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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마니 Sep 03. 2022

밥벌이 이야기

- 공공기관 16년 차의 넋두리 -

나는 대학 4년 동안 한 학기 휴학을 하고, 24살 여름에 졸업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운 좋게 공공기관에 계약직으로 취업을 했고, 같은 곳에서 올해로 꽉 찬 만 16년 차가 되었다. 16년이라는 기간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걸리는 기간과도 같다. 사회생활은 마치 학창 시절처럼 도전과 실패, 배움과 성장의 반복이었다. 입사 초반에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처럼 모든 게 배울 것투성이고 친구도 사귀면서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입시 준비를 하듯 정규직 전환을 거쳐 승진을 하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반대로 감격의 순간들을 겪기도 했다.


16년간 한 직장을 다니다 보니, 회사와 함께 울고, 웃고, 무너지며 또 성장했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내 인생에 녹아 있다. 처음 이 회사에 면접을 보고 합격하기까지 모든 게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 회사에 속해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고, 회사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었다. 물론 업무에 허덕이던 시간들도 많았고, 좋았던 기억보다 힘들었던 기억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내가 긴 시간을 버틴 것은 아직까지도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어서였다. 그런데 그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옅어져 간다는 게 힘들다.


공공기관은 장단점이 너무 확실한 곳이다. 장점이 곧 단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곧 장점이기도 하다. 공공기관의 안정적인 근무환경은 엄청난 장점이지만, 그로 인해 '나도 안 나가고, 저 놈도 안 나가는' 불편한 적과의 동침을 감수해야 한다. 그나마 같은 부서가 아니면 다행이지만, 순환보직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그리고 공공기관의 큰 단점이라면 자율성 부족이 있을 수 있다. 업무를 하면서 창의적으로 계획할 수 있는 폭이 상당히 좁다. 관련 규정도 준수해야 하고, 각종 감사에 대비해야 하며, 과거에 사례가 없던 일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덕분에 업무의 결과에 대해 책임질 일도 적다.


공공기관을 다니면서 정부가 바뀔 때마다 또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지만, 가장 큰 변화는 '공공기관 지방이전'이었다. 우리 회사도 2014년에 지방이전을 했고, 벌써 8년이나 지났지만, 난 아직도 여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지방이전을 기점으로 인생이 180도 달라진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를 한다면서 좋아하는 분들도 더러 계셨고, 온 가족이 이주해서 정착한 분들도 계시지만 많지 않고, 대부분은 아직도 출퇴근 지옥을 겪으며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나 역시 주중에는 사택에서, 주말에는 서울 집으로 두 집 살림을 이어가고 있다.


지방이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할 말이 많지만, 그런 것들은 배제하고 회사차원에서 생각해봐도 지방이전 이후 회사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부에 있다. 지방이전 이후 구성원 간 소통 부족이 불러온 갈등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코로나 시국이 덮치면서 더 심해졌고, 지금은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전쟁 중이다. 문제점들은 수면 위로 떠오른 지 오래인데, 해결이 쉽지 않다. 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급변하는 환경에 유연성이 부족한 공공기관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제일 크다. 구성원들의 합리적인 요구에도 개선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것은 공공기관이라는 한계 때문이다. 구성원 간에 요구와 거절이 반복되면서 갈등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나도 갈등관계의 이해당사자가 되어 누구를 미워하기도 했고, 치열하게 노력해서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방관을 선택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회사에 문제가 생겨도 해결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해결 방향들이 예상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회사 내 갈등 상황을 지켜보면 해결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과거의 해결책들이 누군가의 희생을 통한 것이라서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는 다룰 수 없었던 이슈들이라서 해결될 수 없는 것인지, 뭐가 맞는지도 판단이 점점 흐려진다. 

지방이전 이후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사심이 점점 미움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너무 좋아했던 상대가 반대로 미워져 버리는 순간이 있는데, 요즘 나는 내 밥벌이에 대해 점점 그런 감정이 든다.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미움도 커져버린 상황이다. 장거리 출퇴근으로 몸이 지쳐버린 것도 있고, 공공기관이라는 울타리가 나를 옥죄어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변한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회사에는 늘 문제가 있었고, 그럼에도 견뎌낼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힘을 다 소진해버린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벌이로서 내가 이곳을 많이 자랑스러워했고, 좋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과연 나는 이 권태기를 잘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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