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을 가기로 한건 우연히 보게 된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가을 단풍에 물든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나무들 사이로 긴 다리가 펼쳐져 있는 사진이었는데, 이미 인스타그램 속 핫플레이스인 탓에 멋진 인증샷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진 한 장이 주는 힘이란! 가을의 끝자락을 느끼러 사진 속 그곳으로 마지막 가을여행을 가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 꿀 같은 반차를 내고 대전으로 향했다. 팀원 중에 대전 토박이가 있어서 대전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대략적인 계획을 잡았는데, 이해가 안 갔던 것은 대전 신세계 백화점을 꼭 가라는 것이었다. 아니 왜? 백화점이 명소가 될 수 있지? 반신반의하면서 그래도 저렇게 추천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백화점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큰 규모의 백화점과 바로 옆에 붙어있는 금빛 엑스포타워가 한눈에 들어왔다. 와! 여기 광역시였지? 하늘은 파랗고, 아름답게 흐르는 하천 뒤로 넓은 백화점 건물과 높은 엑스포타워 건물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대전의 첫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금요일 오후였던 탓에 조금은 한산했던 백화점을 여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아이쇼핑도 하고, 유명한 태양커피에서 아인슈페너를 한잔 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우유크림과 쌉싸름하고 진한 커피의 조화는 말해 무엇할까? 천천히 마신다는 것이 어느덧 텅 비어버린 잔을 버리기 아쉬워 크림을 핥고야 말았다. 아인슈페너를 먹고 나니 살짝 허기가 돌아 호우섬에서 간단히 배를 채우기로 했다. 항상 웨이팅이 있기로 유명한데, 금요일 오후 4시에 식사를 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블랙하가우와 라구짜장, 홍차맥주를 시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요기라고 하기엔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역시 웨이팅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대전 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태양커피, 호우섬, 크리스마스트리, 하늘공원, 꿈돌이)
해 질 녘이 되어 신세계 백화점의 유명한 하늘공원으로 갔다. 백화점 옥상에 이렇게 멋진 공원을 만들 수가 있다니! 엄청난 규모의 탁 트인 전경,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쓸쓸하고 한산한 느낌마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조경들. 하늘공원 하나만으로도 백화점에 올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환상적인 일몰을 공짜로 즐기고, 어릴 적 추억이 살아있는 귀여운 꿈돌이도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백화점에서 쇼핑 빼고 다했다. 그만큼 즐길거리와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노잼 도시 대전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곳이다. 여긴!
백화점을 나와 바로 옆 엑스포타워 38층 스타벅스로 갔다. 여기가 또 뷰 맛집이라,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탄성을 부르는 풍경을 보니, 스타벅스가 이렇게 멋질 일인가! 여기는 돈을 따로 받아야 하는 거 아닌지 하는 생각을 했다. 운 좋게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창밖의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 때마침 금요일 퇴근시간이 겹쳐 교통체증에 길게 줄을 선 자동차들마저도 빨간 크리스마스 전구가 반짝이는 것처럼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곧 그 빨간 전구들 사이에 우리 차도 들어가게 되었지만.
스타벅스 대전엑스포스카이점(38층 전망)
여행에서 먹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나는 대전을 가기 전부터 맛집을 열심히 검색했다. 대전 토박이인 팀원이 여러 곳을 추천해줬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저녁과 아침 딱 두 곳뿐이었다. 신중하게 결정한 저녁은 아롱사태 전골 사진을 보고 반해버린 '오대삼'이었다. 테이블링 앱으로 미리 줄서기를 해서 10여분 대기 후에 가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선택은 훌륭했다. 가게가 크지 않아 아기자기하고 복작복작대는 분위기에 음식 하나하나 너무 맛있고, 정성이 느껴졌다. 금요일 저녁, 불금에 난생처음 와본 대전에서 뜨끈한 전골에 소주 한잔 하고 있자니, 이래서 여행이 너무 좋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낯선 곳과 맛있는 음식의 조합은 이미 최고의 행복이다!
오대삼(오대삼전골, 명란감태주먹밥)
다음날 아침, 우리를 대전으로 이끈 사진 속의 바로 그곳 '장태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일출로도 유명한 곳이라, 일출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제법 이른 시간에 산을 올랐다. 등산이라고 하기에는 10분 정도라 충분히 부담 없이 갈 수 있었다. 도착했을 때가 7시 반쯤이었는데 해가 곧 뜰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눈부신 해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고,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햇빛이 찬란히 메타세콰이어 나무 위를 밝게 물들였다. 주변에 계신 출사 나온 분들의 카메라가 바쁘게 움직였다. 나도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두 눈으로 보이는 환상적인 풍경을 사진이 다 담지는 못했다. 다행히 초겨울 바람에도 아직 단풍이 짙게 물든 잎들이 잘 버티고 남아있어서 사진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년엔 여름에 푸릇푸릇한 모습을 다시 보러 오자고 다짐했다.
장태산 자연휴양림
휴양림을 나와 대전에서 제일 유명한 맛집 '태평소국밥'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다. 소국밥과 내장탕, 육사시미의 조화가 대전과 자꾸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개운하고 맑은데 깊은 맛의 소국밥과 얼큰하고 진득한 게 계속 땡기는 맛의 내장탕, 쫄깃쫄깃 고소한 육사시미까지 완벽한 아침이었다. 아침을 먹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길에 성심당을 들렀다. 맛있어 보이는 빵들을 담고 나니 쟁반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나마 참고 참아서 엄선한 빵들로만 골라 담아 이동하는 동안 틈틈이 먹었다. 성심당 빵은 왜 맛에서 정성이 느껴질까? 도대체 빵에 무슨 짓을 하는 건지 토마토와 치즈, 양상추가 들어간 특별할 것 없는 샌드위치였는데, 인생 가장 맛있는 샌드위치로 남아버렸다. 이러면 이제 다른 거 못 먹잖아.
(좌) 태평소국밥 (우) 성심당 대전롯데백화점
다음으로 '테미 오래'라는 옛 충남지사 관사촌에 들렀다. 운 좋게 문화해설사 선생님을 만나 애정 어린 설명 덕분에 대전의 몰랐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관사별로 다른 테마를 가지고 특색 있게 운영되고 있어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었다.
테미오래(옛 충남지사 관사촌),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목척교'
관사촌을 나와서 예쁜 카페와 식당들이 유명한 소제동으로 향했다. 소제동의 첫인상은 익선동과 판박이였다. 옛 가옥들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채로 힙한 인테리어를 더해 예쁜 곳들이 정말 많았다.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게 만드는, 가게마다 비슷한 듯 다른 포인트들을 찾아 열심히 골목골목을 구경했다.
소제동 카페거리
대전을 여행하면서 대전 사람들은 대전을 참 사랑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게, 문화해설사 선생님도 대전 토박이 우리 팀원도 대전을 얘기할 때 그들의 눈빛은 반짝거린다. 자기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대전 사람들은 조금 특별한 것 같이 느껴졌다. 노잼 도시라는 농담 때문인지, 다른 대도시보다 유명한 게 없다고 느껴져서인지 모르겠지만, 대전에 대한 사랑을 전파하고 싶은 진심이 느껴진달까?
덕분에 나도 이제는 대전을 사랑할 지경이다. 한밭 같은 넓고 큰 매력을 지닌 대전, 1박 2일로는 짧았다. 한 달 동안 살면서 동네별 맛집들을 전부 탐방하고, 소소한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대전인으로 살아볼 날을 기대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