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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 완 Nov 17. 2021

미워할 수 없는 나의 아버지- 자식사랑

경제적인 책임은 다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정성이 고맙다  

나이가 들어서라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재미있게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꼭 학생 시절에만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때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공부하기 싫은 모습을 하면 

'지금 공부하기 싫으면 네가 공부하고 싶을 때 해라'

라고 말할 정도로 공부를 하는 자체가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공부를 한다는 것이 때로는 힘들기도 하고 버겁기도 했다.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는 학교에서 쓰러지는 경험을 하며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들을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슬퍼서 펑펑 울면서도 나는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에 공부시키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할 줄 몰랐다.  


때로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공부를 시키지 않았거나 대학교를 보내지 않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원망하는 분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내가 가고 싶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못했고 대학을 보내주지 않은 부모님으로 인해 나이를 들어 공부를 하느라 힘들 때가 있는데

 '나는 왜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져본다.


부모역할 중에 자녀를 가르쳐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 있음에도 나의 아버지가 보증을 서서 가정이 어려워져 먹고사는 것뿐 아니라 자녀를 가르치는 것에도 걸림돌이 되었었다. 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유로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아버지에게 화가 나야 하는데 나는 왜 그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기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을까?


부모님의 말은 그대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부모님에게 맞추어주는 착한 딸이라서 그런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했는데 나는 누구에게 맞추어 주는 사람만은 아니다. 내 생각과 다르면 나의 의견을 말할 줄도 알고 표현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부모님에게는 내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특히,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은 더 어려웠을까? 생각을 해 본다.


엄마에 의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까다로운 아이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영아기 때 내가 보채면 엄마가 달래다가 지쳐서 나를 밀쳐놓을 정도로 힘들게 할 때면 아버지는 보채는 나를 안고 밤새도록 달래며 잠을 재웠다고 한다.


또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나의 오른쪽 발에 큰 화상을 입어 아팠던 때이다. 이 시기는 아파도 병원에 가기보다 주로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할 때라서 나의 화상 입은 발의 화기(火氣)를 치료하기 위해 소주에 화상 입은 발을 담가 치료를 하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내가 잠결에 소주가 담긴 통을 엎지르면 화상 입은 발의 화기(火氣)가 빠지지 않을까 봐 밤새도록 내 발을 잡고 소주 통에서 발이 빠지지 않도록 내 곁을 지키며 치료해 준 고마운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울에서 직장 생활할 때 '눈뜨고도 코 베가는 곳이 서울이라며 가지 못하게 말렸던 부모님께서는 내가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도 함께 서울에 오셔서 방을 얻어 세간살이를 사 주셨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매일같이 점심시간이면 내가 다니는 회사에 전화를 해서 

'수니야! 컴퓨터만 보지 말고 하늘도 쳐다보아라, 오늘 하늘이 참 예쁘다'

'수니야! 컴퓨터만 보면 눈 나빠지니까 창문 밖의 초록색 나무도 보아라' 등의 말을 하셨다.

이에 회사에서 매일같이 12시에 울리는 전화벨은 '수니네 아버지다'라고 직원들이 알 정도로 아버지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스물세 살 전화기가 없어 자취하는 주인집의 전화를 써야 했던 시절..

친구와 함께 자취하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자정이 넘어 자취방에 강도가 들어왔고 무서움에 친구와 함께 부둥켜안고 울다가 주인집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새벽시간인데도 집에 전화를 했다. 내 전화를 받은 부모님은 밤새 잠도 주무시지 않고 가장 빠른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셔서 

'돈도 필요 없다, 집에 내려가자'며 나를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셨다. 내 고집으로 집에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나를 안아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경제적으로는 자녀들을 마음껏 충족시키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시켰지만 정서적으로는 참 따뜻하고 정성을 들여 자식들을 사랑한 마음이 느껴졌기에 나뿐만 아니라 동생들까지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존경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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