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주렁주렁 / 아놀드 로벨, 애니타 로벨 / 시공주니어>
자, 여기 돼지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나무가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는 팔에 밧줄을 감고 있는 아주머니가 그려져 있네요. 아마도 아주머니가 그 밧줄로 돼지들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나무에 매다는 일이 아주 힘겨웠나 봅니다. 아주머니 표정이 아주 힘겨워 보입니다. 나무에 매달린 돼지들이 빙글빙글 웃고 있는 모습과 상반됩니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집 창가에 웬 잠옷을 입은 아저씨가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네요. 그림책 <돼지가 주렁주렁>의 표지에 실린 광경입니다. 대체 이 그림책은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이야기 속 게으른 남편은, 아내가 돼지 먹일 옥수수를 심자고 하자, 돼지들이 마당에 꽃처럼 피어나면 도와준다고 하고. 아내가 돼지들이 뒹굴 진흙을 만들자고 하자, 돼지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리면 도와준다고 하고. 아내가 돼지 먹일 물을 긷자고 하자, 돼지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주룩주룩 내리면 도와준다고 합니다. 이 같은 반복 구조 속에서 때로는 능청맞고 때로는 졸리고 때로는 귀찮아하는 남편의 표정과, 때로는 화가 나고 때로는 어처구니가 없고 때로는 슬픈 아내의 표정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아내는 끝내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래도 남편의 말을 믿어보고 싶은 것일까요? 아니면 남편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아내는 순순히 남편의 말대로 돼지로 꽃밭을 만들고, 돼지를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고, 돼지를 비처럼 주룩주룩 내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매번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이 돼지들이 봄눈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는 남편의 소원을 이루어 줍니다. 그제야 깜짝 놀란 남편은 침대를 박차고 나와 돼지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예상했듯이, 둘은 화해를 하고, 두 부부와 돼지들의 행복한 한때를 그린 장면들로 이 그림책은 끝을 맺습니다.
1979년 아놀드 로벨과 애니타 로벨 부부가 함께 만든 이 그림책은 전형적인 옛이야기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게으른 사람에게 주는 교훈, 현명한 아내 덕분에 남편이 게으름을 고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내용이 그러합니다. 4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돼지가 주렁주렁 나무에 매달린 모습이나 돼지들이 비처럼 내리는 모습을 그림으로 구현한 장면들은 지금도 꽤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펜 선이 주는 고전적인 느낌은 여전히 매력적이며, 모든 장면이 액자 안에 그려져 있어 마치 옛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난 뒤에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치고 힘들어하던 아내의 표정이 계속 떠오른 탓일까요? 현실에서라면 게으른 남편이 과연 버릇을 고쳤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만약 요즘 시대에 이 이야기를 다시 쓴다면 어떤 줄거리가 탄생하게 될까요? 애초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편을 과감하게 내치거나, 아내 혼자 돼지들을 데리고 집을 떠나는 이야기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돼지들과 함께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살고 있을 때, 모두가 떠난 집에서 남편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어쩔 줄 모르게 된다는 줄거리 말이에요. 이렇게 게으른 남편에게 주는 통쾌한 결말을 한번 상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