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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진 May 17. 2024

캐러멜라이즈 양파, 한식의 구원자 2편

5화 서양의 양파는 한국의 양파보다 달다.

이 자슥은 요리책 쓴다면서 레시피 얘긴 안 하고 왜 틈만 나면 옆길로 새서 요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나 싶으시겠지만, 이에 대한 비난을 사전 차단하기 위해 추천대상에 'TMI를 좋아하는 당신에게'라고 미리 못 박아 두었다. 세상에 나보다 빠르고 맛있는 레시피를 소개하는 뛰어난 요리사들은 지천이다. 그러나 프롤로그에 소개했듯,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다가오는 세끼의 식사가 어떤 의미이며 또 그 모습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보다 우리 남은 생, 어떤 시선으로 음식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다. 내 글이 빛나는 지성에 기대 정답을 던지는 명쾌함보다는 멈춤과 망설임이 더 많이 묻어나는 느린 글로 읽히기를 희망하며, 오늘도 이렇게 하찮은 요리 실력에 그럴듯한 핑계를 붙여 본다.


'단맛'과 '설탕'은 미식 그 자체로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이기에 미묘한 선을 타느라 자꾸 말이 길어진다. 당연히 정답도 없다. 그러니 더더욱 음식과 요리를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단맛과 설탕은 반드시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주제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글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단맛’과 ‘설탕’이 같은 위상으로 읽히는 착각이 들 수 있다. 먼저 이 두 단어를 반드시 구분해서 읽어주면 좋겠다. 왜냐하면 ‘단맛’과 ‘설탕’을 분리하는 것이 오늘 내 글의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나긴 서론을 끝내러, 자 들어가자.



7. 지난 편에 뭔 소리 했는지 너무 길어서 기억도 안 나네


“설탕은 죄가 없다.”라는 대선 슬로건으로도 손색없을 세련된 문장을 보았다. 지당한 말씀이시다. 설탕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을 포함한 입에 들어가는 모든 식품은 과다 섭취하면 반드시 독이 된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양을 특정하지 않고 효능을 이야기하는 것을 사바세계에서는 보통 허위 또는 과장광고라 부른다. 그러나 송구스럽지만 아무도 설탕을 범죄자 취급하지 않았다. 다만, “죄는 없다만, 넌 너무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놈이니 여기까지 와서는 놀지 않는 것이 모두의 신상에 이롭겠다.”라는 목소리였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입방아에 오르는 설탕 논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님아, 차마 그 선은 넘지 마오” “좀 넘어도(넣어도) 괜찮아유~”라는 두 파워 인플루언서 간의 논리 다툼으로 "설탕이 어디까지 와서 놀아도 괜찮은가?"에 관해 음식을 사랑하는 대중들 간의 치열한 토론으로 나는 바라본다. 즉, 논쟁의 본질은 설탕 존재의 선악이 아니라 설탕의 활동반경 즉, ‘선’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먼저 확실히 해두고 넘어가고 싶다. 이 ‘선’ 관해 필자가 여태 보고, 느끼고, 궁리한 결과 말하고 싶은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반찬을 전개하는 한식 상차림의 구조적 형태> 그리고 <한식 그 자체라고 봐도 부족함이 없을 장류(간장, 고추장, 된장)의 압도적 위세>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한식 식탁에서 단맛의 개입, 그리고 이 단맛을 위한 설탕의 사용은 필연이라 주장했다. 이것은 맛의 구조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딱히 나쁠 이유도, 그래서 설탕 사용 자체에 대단한 죄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나아가 미쳐버린 야채 값을 들며 한식에서 설탕의 색채를 제거하는 것은 앞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필자가 진정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부분은 두 번째로, 이 설탕은 애초에 치명적인 힘을 가졌다 보니 ‘선’을 넘나드는데 망설임이 없다는 점에 있다. 중요한 포인트는 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달콤한 음식'과 '짠 음식'을 구별하는 ‘선’> 이자 <'짠 음식'에서 설탕이 개입되어야 하는 ‘적정 양’을 이야기하는 ‘선’>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의미한다. 이 경각심을 위해 ‘포르노’니 ‘미개함’이니 하는 조금 거친 단어를 사용한 것이니 양해를 구한다. 이 선이 구체적이지 않아 문제가 생기는 부분은 ‘맛’ 그 자체보다 ‘문화’의 영역에 있어서 더 심각하다고 말했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일상에서 즐기는 한식의 섬세화와 세계화, 나아가 이 땅에 '식재료의 시대'를 완벽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게 만드는데 핵심적 원인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제 내가 입에 올릴 주제는 단 하나, 요리 기술자의 입장으로써 이 ‘선’의 '적정 위치'와 '옮기는 방법'에 관해서다.



8. 서양도 음식 달게 먹습니다. 다만, 그게 설탕 단맛이 아닐 뿐


이번에는 긍정적인 외식 경험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곱게 회사를 다닐 적, 일본에 사는 친구에게 놀러 간 적이 있다. 도쿄 어디 뒷골목 데려간 이자카야에서 '카니미소'라는 게딱지 요리를 먹어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이런 진미가 다 있나". 게의 내장과 된장 그리고 그 집만의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약간의 마요네즈가 섞여 잔혹할 정도의 감칠맛을 내는 요리였다.


카니미소(좌)와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스타일의 털게 요리(우)


산 세바스티안은 세계에서 면적 당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배출하며 유럽의 주방을 넘어 "프랑스를 이긴 스페인"이라는 서사의 시작이자, 오늘날 명실상부 세계 미식을 이끄는 장소 중 한 곳이다. 나는 이곳의 요리학교 첫 수업에서 한 요리를 배우게 된다. 산세바스티안 미식 역사에서 첫 번째 '고급' 요리로 손꼽는 'txangurro a la donostiarra'다. 해석하면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스타일의 털게 요리"정도다. 서너 명의 요리사들이 붙어 살짝 쪄낸 털게의 내장과 살을 오후 내내 깨끗이 발라내는 동안, 한편에서는 양파, 당근, 피망 등의 다량의 기본 야채들을 약불에 오랜 시간 볶는다. 약간의 브랜디로 향을 덧대고, 미리 준비해 둔 해산물 베이스의 소스와 토마토 농축액을 추가한다. 여기에 완벽하게 손질된 게살과 내장과 남김없이 넣는다. 소금으로 간을 하며 모든 맛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한 소끔 익힌다. 완성되면 건더기가 많이 든 죽 같은 형태를 띠는데, 게딱지 안에 이 내용물을 채워 넣고 약간의 버터와 빵가루를 뿌린 뒤 고온의 오븐에 살짝 구워 그라탱화 시킨다.


 "세상에 이런 진미가 또 있구먼". 가히 '카니미소'의 충격에 버금가는 맛이다. 다만, 내가 집중했던 부분은 폭발적인 게 내장의 감칠맛을 맛의 흐름에 있어서 끝까지 받쳐주는 야채의 부드럽고 안정적인 단맛이었다. "서양 사람들도 살짝 달게 먹긴 하는구만". 돌아온 이론시간에 선생님은 관심법이라도 쓴 건지, 우연히도 이런 말을 한다. "바스크 요리가 이토록 맛있고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음식 전반에 흐르는 미묘한 단맛이다."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사실 미묘한 단맛이 흐르는 건 바스크 음식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9. 서구의 맛


거의 모든 서구권의 음식이 그렇다. 그 이유는 바로 야채이다. 프랑스에서 'holy trinity=신성한 삼위일체'라고 불리는 양파, 당근, 셀러리 그리고 구성 재료가 살짝 다르긴 하나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말하는 'sofrito'라는 양파, 당근, 피망 등의 조합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양파가 빠지는 경우는 없다. 이것이 모든 서구 요리의 저변에 깔린 맛의 비밀이자 너무 평범해서 누구도 의식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는, 서양 요리의 핵심이라 나는 생각한다. 야채는 달다. 그것도 우리 생각보다 훨씬. 이 야채의 단맛이 대부분의 서양 요리를 구성하는 첫 번째 맛의 레이어이자 그 위에 어떤 맛이 세워지더라도 설탕 한 톨 없이도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단맛과 감칠맛, 그리고 자연스러운 복합미까지 덧대주는 강력한 맛의 근원이다. 주인공 식재료가 무엇이 되었건, 짠 요리라는 틀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몰래 뒤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체적인 맛의 바탕을 깔아준다.


그런데 요리를 좀 하시는 분이라면 혹시 눈치챘을지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포인트를 내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양파, 당근, 피망 등의 다량의 기본 야채를 약불에 오랜 시간 볶는다.> 이 문장에서 '야채'말고 다른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바로 '약불에 오랜 시간'이다. 지금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깜빡 있고 있던 요리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을.



10. 맛있다 vs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요리 공부하기에 약간은 만학도로서의 나의 유학 생활은 "맛있는 요리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변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이 질문에 처음으로 힌트를 준 레스토랑이 있다. 무려 반세기라는 유구한 역사를 뒤로 하고 2022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Zuberoa(수베로아)라는 곳이다. 지금 한국에서 날아가는 첫 번째 솜씨들인 강민구나 임정식 등의 걸출한 셰프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수베로아의 영업 종료에 전 스페인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 했다. 바스크 미식의 시작을 상징하는 한 곳이자, 다른 유명한 셰프들과는 달리 언론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그 누구보다 일찍 주방에 등장하는 삶을 살아온 노장 힐라리오는 셰프들의 셰프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이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마지막 해, 나는 힐라리오의 보조로써 가장 오랜 시간을 그의 옆에서 보내면서 수베로아의 비밀을 훔치는 기회를 가졌다.


내가 했던 업무 중 하나는 매일 아침 닭 육수와 생선 육수 두 가지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수베로아의 육수를 맛보면, 농담 조금 보태서 바로 밥을 말아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뉘앙스가 살짝 다를 뿐, 정확히 진한 닭곰탕과 대구 지리탕의 맛이 난다. 이 육수는 거의 모든 요리에 개입하는데 무엇보다 수베로아가 자랑하는 수십 가지 소스들의 베이스가 된다. 나는 어쩌면 뛰어난 요리사는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야지"라기보다는 "이렇게 하면 맛이 없을 수가 없지"라는 마음으로 주방에 서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은밀히 공개하는 이 소스들의 맛의 저변에는 '아주 오래 볶은' 엄청난 양의 야채들이 몰래 숨어있다.



11. '맛 시간 총량의 법칙'


'맛있음'은 주관적이다. '맛있다'라는 문장이 당신의 뇌리에 꽂히기까지는 좋은 식재료, 적절한 테크닉, 향을 조합하는 요리사의 센스, 먹는 당신의 미식적 수준 그리고 '당신이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누구인가'까지 수많은 직, 간접적 요인들이 개입한다. 그러나 요리사의 입장에서 비슷한 퀄리티의 재료를 사용한다는 가정 하에, 세 번의 허기를 해결하는 우리 일상적 요리들의 수준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미슐랭 스타를 보면 진귀한 식재료나 셰프의 카리스마 등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주방 뒤편에서 최저시급 이하로 영혼을 갈아넣는 요리사들의 '시간'을 먼저 바라본다. 애초에 미슐랭 레스토랑과 우리 집 주방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 안다. 그러나 미슐랭이라고 사실은 뒤에서 무슨 엄청난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것 또한, 이제 나는 안다. 요리에서 내가 지금 쏟고 있는 이 시간이 과연 '정성'인가 '삽질'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 요리사 혹은 오너의 조리적 판단 능력은, 특히 레스토랑의 비즈니스 관점에서 극도로 중요하다. 그러니 어떤 요리를 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며, 또 무작정 시간을 쏟는 것 자체가 언제나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는 문화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니 "맛은 들인 시간의 총량에 비례한다."라는 필자의 뭉툭한 논리를 조금 더 따라와 주면 좋겠다.



12. 기승전 시스템


이렇게 요리에 '시간'이 의미 있는 수준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반대로 이야기하면 조금만 시간을 들일 의향이 있다면 가정에서도 월등한 수준의 맛을 구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음 편에서 마무리하겠지만, 들인 시간대비 요리의 전체적 수준을 높이는데 가장 큰 효과를 내는 방법 중 하나는 이것이다. 바로 <양파, 파, 당근 등의 냉장고에 흔히 있는 기본 야채들을(1) 잘게 썰어(2) 약불에 오랜 시간 볶아서(3) 요리에 적절히 사용하는 것>라는 사람 당황스럽게 간단한 방법이다. 당연히 이는 추가적 비용이 발생하는 행위이며, 모든 요리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자체로 한식의 맥락에서 설탕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의미 있게 생각하는 포인트는 요리의 '사고 과정'에 제동을 거는 것에 있다. 다짜고짜 설탕을 붙잡기 전에 '오래 볶은 야채는 달다'라는 인식을 통해 알게된 단맛을 더 하는 새로운 선택권을 앞서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됐든 단맛의 개입이 필요한 한식에 무자비한 설탕 특공대가 투입되기 전, '짠 요리'의 맥락을 해치지 않으면서 일차적으로 단맛의 필요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 게다가 단맛 뒤에 따라오는 야채의 은근한 감칠맛과 복합미는 부차적 장점이라고 말하기에는 멋쩍은 엄청난 역할을 수행한다. 현재 한식의 맥락에서 설탕을 쓰는 것은 '필요해서 넣는 것'을 넘어 '습관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적 행위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앞서 말한 단맛의 '선'을 움직 일 수 있는 것은 특정 재료의 사용이나 대체가 아니라 요리의 '사고 체계'라고 본다. 이는 곧 '의식'을 바꾸는 것으로써 궁극적으로 '문화'를 바꾸는 일로 나아갈 수 있다.



13. 시간이 만드는 풍경, 맛 그 너머에


이 듣도 보도 못한 '맛 시간 총량의 법칙'이라는 관점에서 식문화를 비교해 바라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보인다. 나는 서양의 요리법은 한 마디로 '맛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육수를 빼던, 소스를 끓이던, 메인을 익히건 그게 뭐가 됐건 주방에 들어섰다 하면 높은 확률로 양파, 당근, 파부터 잘게 썰어 오래 볶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리의 시작부터 '시간의 개입'이 본격적으로 발생한다. 그 바탕 위에 다양한 향신료와 주인공 식재료의 힘이 더해져 최종 맛을 그려낸다. 그래서 서양에서 가정식과 레스토랑의 요리 수준의 편차는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크다. 당신이 운이 모자라 스페인 어디 음식 솜씨가 조금 부족하거나 워킹맘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면 높은 확률로 참혹하리만큼 형편없는 음식과 함께 유년을 보내게 됐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동시에 이 부분이 바로 서양의 외식산업이 일상에서 그렇게 존중받고 인정받으며, 고급화의 길로 쉬이 나아갈 수 있었던 핵심 원동력이라고 본다.


반면, 우리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물론 찜이나 특정 국, 탕류 등 오랜 시간이 필요한 요리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무침이나 볶음 등 빠른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는 요리들이 많다. 그래서 나는 한식 요리법은 '맛을 입히는 과정'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맛을 위한 시간'은 이미 '장'에 전부 쌓여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맛을 내기 위해 보통은 요리 과정에 고루 분배되었어야 할 시간을 '장'이 홀로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장은 짠맛과 함께 폭발적인 감칠맛, 특유의 풍미 모든 것을 한 큐에 제공한다. 그래서 한식은 고급 한정식집이나 우리 엄마가 한 집밥이나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차가 그렇게 크지 않다. 나는 이 지점이 바로 장 문화권이 가지는 위대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겠지만, 이를 한 가지 이유로 나는 진심으로 한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식문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동시에 한식이 '식재료 주인공 시대'의 지평을 완전히 열어젖히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 또한,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14. 서양의 양파는 한국의 양파보다 달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라는 허영만 선생님의 아름다운 문장을 지극히 조리과학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선생님이 서양인이었으면 그 말씀 쉽게는 못하셨을 겁니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한식은 그만큼 장 덕에 큰 편차 없이 평균 이상의 맛을 낼 수 있는 식문화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온 안정적 단맛과 감칠맛을 지지기반으로 맛을 전개되는 서양요리와는 달리, 한식은 맛있게 만들기 위해 굳이 시간을 들여 몸부림을 칠 동기가 현저히 적다. 아니, 불판에 삼겹살 한쪽 구워서 된장만 찍어도 더할 것도 뺄 것 도 없이 맛있는데 무슨 시간낭비를 더 하겠는가? 그 맛있는 고추장에 설탕 한 스푼 넣으면 그 자체로 맛이 완결되는데 도대체 누가 양파 미르푸아로 잘게 썰어 약불에 한 시간 동안 볶는단 말인가?


그래서 많은 경우 한식에서 야채는 요리의 '맛의 근간'으로써 행동한다기보다 개념적으로 '가니시'로써 기능한다. 제육볶음에 큼직하게 썬 당근이나 양파, 파 등이 마지막에 투입되어 빠르게 볶아내는 것이 좋은 예다. 야채들은 미처 그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대로도 충분히 맛있으니까. 당연히 좋고 나쁜 건 없다. 그냥 그러할 뿐이다. 모든 위대함은 필연적으로 그 크기만큼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듯이. 이런 맥락에서 '오랜 시간이 묻은' 서양의 야채는 한국의 야채보다 훨씬 달다. 하루종일 서서 양파를 볶고 있기에는 한식은 이미 너무 맛있고, 하루종일 서서 양파를 볶고 있기에는 한국은 이미 너무 바쁜 사회다. 장을 제외한다면, 한식에는 절대적 시간이 결핍되어 있다.



+ 15. 장님 코끼리 만지는 일에 관하여


황교익을 입에 올렸으니 결국 백종원에 대한 생각도 말해야 균형이 맞을 것 같다. 전편에 내가 두 분을 개인적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존경한다고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안티 백종원인 사람처럼 보일 것만 같아서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진심으로 백종원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한다. 백종원이 '외식 사업가'로써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가? 10살도 채 되기 전에 별다른 투자 없이도 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버섯 농사를 꿈꿨던, 돈 냄새 맡는데 천부적인 사업가의 피를 진하게 타고난 사람이다. 그는 본인 팔자대로 아주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무엇보다 백종원 더러 '설탕의 일상화'를 가속화시키는 사람이라 비판할 수는 있겠다만, 백종원 자체가 그 문제의 원인은 아니다. 백종원의 등장은 '설탕의 일상화' 시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강력한 자화상일 뿐이다. 그 나름의 시선과 다양한 활동으로 음식을 통해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그의 의도에 대해 나는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다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선한 의도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항상 의식하고자 한다.


특히 음식은 수많은 분야의 이해관계가 극도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주제다. 마치 한쪽 문을 열면 다른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처럼 수많은 분야들이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현상이 아니라 원인에 주목하고자 노력한다. 대체 왜 메인 요리에서 소금이 아니라 설탕이 더 많이 언급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인지, 왜 우리는 양파를 고작 30분 천천히 볶을 시간이 없는 것인지, 도대체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지금 대파값이 돌아버렸는지, 그래서 일상의 한식에서 설탕 대신 야채를 넉넉히 쓰기란 어지간해선 쉽지 않은 일이 되어 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현상이 아닌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게 훨씬 생산적이자 동시에 올바른 방향의 분노라 생각한다.


일상을 살아내는 대부분의 우리는 단지 '맛'에 관한 이야기로 음식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얕은 단계 위로는 누군가는 과학의 눈으로, 누군가는 비즈니스의 눈으로, 누군가는 문화와 예술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피부에 즉각 와닿는 너무나 많은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는 주제이기에, 그래서 요리는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이다. 음식은 '먹고사는 문제'라서 중요하며 동시에 '먹고사는 문제' 그 한참 이상이라 중요하다. 우리가 논쟁을 삼는 것이 단맛이건 설탕이건 다른 그 무엇이 되었건 대부분의 경우 모든 입장은 나름의 이유와 논리를 가질 수 있다. 당신이 어떤 관점에서 요리를 바라보는가에 따라, 당신만의 정답이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과연 넘어졌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궁극적으로는 함께 앞을 향하는 삼각 달리기 일지, 각자의 방향으로 힘차게 달려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누가 먼저 깃발을 뽑는지의 영역 싸움일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대, 세상에 나가 욕 쳐 먹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라"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관계없이 우리의 식문화에 대한 나름의 고민과 의견을 가지고 다투며 살아가는 것이 문화 시민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이 게임에서 시선과 방향이 매우 뚜렷한 한 주체로써 “쏟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나.”라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지 않는 것은 아니나, 충돌과 합의가 교차하는 지난한 대화의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와 문화가 발전하는 지극히 당연한 방식이라 위안하며, 그저 “팔자소관이다”라며 몰래 읊조릴 수밖에. 이것이 결국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가 아닐는지, 속 편한 마무리를 내놓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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