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진 Jul 13. 2024

세 단계 양파를 적용한 제육볶음

7화. 레시피는 사회를 반영한다.


여러 편에 걸쳐 한식과 설탕, 그리고 그 단맛의 대안으로써 양파를 위시한 야채의 활용을 입에 올렸으니 이제 실제 예시를 드는 것이 도리일 듯하다. 한식을 이야기하며 여태 비중 있게 다뤘던 부분 중 하나는 단연 ‘장’이었다. 그러니 장이 주인공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메뉴로 배움을 시험해 보도록 하자. 잠깐 언급하기도 했던 제육볶음이다.


우리가 다루는 것이 요리이던 다른 그 무엇이던 언제나 본질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여, 먼저 무엇이 제육볶음을 제육볶음이게 하는지 생각해 보자. 제육볶음의 맛을 떠올려 보면 고추장과 고춧가루의 매콤함이 첫 번째다. 그리고 이 매운맛의 균형을 잡기 위한 그 대척점에 있는 단맛이 두 번째로 이어 필요하다. 이 두 주인공의 밸런스 사이로 간장이나 마늘 등의 부재료가 위의 두 주연만으로 미처 다 채우지 못한 짠맛과 감칠맛, 그리고 향을 덧댄다.


좀 더 맵거나, 달거나, 국물이 넉넉하거나, 수분이 없게 바싹 익혔거나, 실로 다양한 스타일과 취향의 제육볶음이 있으나 결국 제육볶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포인트는 “매운맛과 고기의 조화”로 양념의 밸런스 조정에 있다. 그러니 특별한 품종이나 특수 부위를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제육볶음은 원재료인 고기보다 양념의 힘에 기대는 전형적인 요리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양념만으로도 이미 제육볶음의 맛은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제 우리는 돼지고기의 어떤 부위에 이 맛을 “입힐지” 결정해야 한다. 제육볶음만을 위한 부위 같은 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속 편하게는 “오로지 그대의 선호도에 따라 고르면 되십니다.”라고 말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우리 독자분들은 말 많은 필자를 따라 요리를 쓸데없이 어렵게 배우겠다 작정한 분들이니 생각할 시간을 좀 더 가져보자.


식재료의 선택은 두 가지로 결정한다. ‘특성(=맛)’과 ‘가격’이다. 내가 언제나 의식적으로 잊지 않으려 노력하는 지점이 있다. 재료의 특성과 가격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세상의 모든 식재료는 고급, 저급이라고 이마에 도장 찍혀 창조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고기가 돼지고기보다 고급이라 말할 수 없으며, 수십 배 싸다는 이유로 양송이가 트러플보다 저급인 식재료는 아니다. 철갑상어가 금붕어만큼 흔한 어류였다면 캐비어가 그토록 비쌀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가격은 인간세계에서 희소성과 함께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장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숫자일 뿐, 그 자체로 식재료 본연의 가치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식재료는 각각의 특성과 그에 따른 장단점을 가진 채로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요리’란 본질적으로 <식재료의 특성을 정확히 포착하여(1), 단점을 깎아내되 그 잠재된 장점을 극대화(2)할 수 있는 새로운 ‘맥락’을 창조(3)하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요리사들이 해내는, 해내야 하는 단 하나의 과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훌륭한 요리사라면 응당 던져야 할 질문은 “돼지고기의 어떤 부위가 제육볶음의 ‘맥락’에 가장 적절한가?”이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오늘 제육볶음 해볼라니 제일 비싼 부위로 한 근 떼주쇼” 멋지게 지르는 것도 나쁘진 않으나, 외식 비즈니스를 설계하거나 프로 요리사라면 마냥 낭만적인 멘트로 들려서는 안 된다. 덮어놓고 비싼 재료를 추구하는 것은 기대와는 달리, 조리적으로도 미식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언제나 낭만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진 못한다. 아, 물론 주머니가 넉넉해 ‘최고급’ 식재료를 쓰면 당연히 요리가 쉽고 편해지긴 한다. 무슨 짓을 해도 맛있을 테니까. 그러나 좋은(똑똑한) 요리는 자본이 아닌 사유의 영역이라, 나는 확신한다.


아무튼 삼천포에 빠진 제육볶음을 건져 다시 돼지고기 부위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자면 먼저 살코기와 지방의 비율(1), 이에 따른 부위별 텍스처의 차이(2), 가격(3) 정도로 특성을 분류할 수 있다. 모두가 알 듯 가장 제육볶음을 위한 대중적인 부위는 앞다리살이다. 목살이나 삼겹살처럼 지방이 두드러지는 풍성한 맛도 아니고, 안심처럼 식감이 딱히 부드러운 부위도 아니다. 직접구이로는 선호도가 떨어지다 보니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그래서 앞다리살은 강한 고추장 양념이 주도하는 힘 만으로 요리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제육볶음의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위로 볼 수 있다. 물론 ‘맥락’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맛’만을 두고 보자면, 지방이 개입하는 삼겹살이나 목살을 쓰는 게 더 맛이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의 요리가 탄생하는 과정에 어떤 사고방식과 기준을 거쳐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에 대한 고민이다. 물론 이 적절함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정답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 얘기가 나온 김에 ‘지방’ 얘기를 잠깐 해야겠다. 어디서 시작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요새 지방 삼겹살이 논란이다. 몇몇 업장에서 지방이 살코기에 비해 너무 큰 부위를 제공한 것이 손님들의 큰 불만으로 이어지고 점주들은 사과와 해명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이 문제는 상식적인 선에서 보면 될 것 같은데, 딱 봐도 지방이 살코기에 비해 절반이 넘는 등 ‘지나치게’ 많은 삼겹살을 내오면 솔직히 나라도 화가 날 것 같긴 하다. 한 명의 소비자로서 불만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이나, 그러나 한 명의 요리인으로써 우려하는 점 또한 만만찮다. 이런 불만들이 고기 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기피’ 또는 ‘혐오’로 번지는 형국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차돌박이 시켜놓고 지방 왜 이렇게 많냐고 불만을 제기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보았다.


하몽으로 유명한 브랜드 Joselito의 Papada


할 말은 많지만 “맛은 지방에서 나온다.”라고 한마디로 요약한다.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 김치가 왜 맛있는지, 도대체 요즘 중국음식이 왜 꾸준히 맛이 없어지는지, 하몽이 왜 세계적인 진미로 꼽히는지는, 모두 지방의 힘에 관한 이야기다. 스페인에 papada라는 식재료가 있다. 돼지 턱 부위를 염장 숙성을 거친 식재료인데 거의 순수 지방이다. 하몽처럼 얇게 썰어 다양한 요리에 활용한다. 지금 흐르는 여론을 보면 혹시 스페인 여행 가서 이 음식을 만나면 “이 새끼들 혹시 인종차별하나?” 생각하고도 남을 것 같아 걱정이다.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그런 섣부른 오해는 넣어두셔도 좋을 것 같다. 비싸서 쓰기 쉽지 않은 재료다. 이 논란의 본질은 어쩌면 남녀를 불문하고 평생 다이어트 대한 무의식적 압박과 사회적 가스라이팅에 시달려 살아가는 한국인의 처연한 숙명 탓은 아닐지, 그래서 지방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넘어서 이제는 죄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 생각해 본다.




[맛의 구조화와 레시피의 설계]

 

언제나처럼 긴 잡설을 거쳐 다시 제육볶음으로 돌아왔다.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요리와 레시피의 구조적 이해와 사고방식이지, 제육볶음 레시피 자체가 아님을 먼저 강조하고 싶다. 맛있는 제육볶음 레시피는 유튜브에 널려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고, 지금은 제육볶음을 인질 삼아 맛을 그리는 과정을 이해해 보자.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를 맛의 관점에서 중요도를 기준으로 공식을 세워보면 대충 이렇겠다.


제육볶음의 맛 = 1 + 2 + 3

1. <양념> = { (매운맛) + (단맛) } + 부차적 재료

2. <메인 식재료> = 고기

3. <서브 식재료> = 옵션


무슨 이런 당연한 얘기를 굳이 하느냐 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레시피는 재료와 조리 순서를 단순 나열한 형태로 작성한다. 요리가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별 일 아니겠지만, 요리를 마법 같은 멋진 일로 여겨 주시는 감사한 분들에게는 난이도에 따라 비행기 조립 정도로 보일 수 있다. 단순 나열식의 순차적 레시피는 “결국 써 있는 재료 다 때려 넣고 익히면 최소한 맛은 비슷하게 나오지 않나?”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유발하는데, 이는 과장 좀 보태서 “큰 보자기에 비행기 부품 넣고 흔들면 최소한 비행기 비슷한 것 나오지 않나?”라는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애써 귀한 재료들도 준비되었고, 앞으로 요리 실력을 키워보고 싶다면 다짜고짜 레시피 순서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먼저 맛을 상상하고, 레시피의 구조를 나름의 간단한 공식으로 만들어보고, 무엇보다 레시피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짚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The Korean Cookbook


앞서 말했듯 세상에 수많은 제육볶음 레시피들이 있을 텐데, 그래도 하나의 기준이 있어야 하니 2024 world best restaurant 6위에 빛나는 뉴욕의 Atomix팀과 최정윤 셰프가 발간한 “The Korean Cookbook”을 레퍼런스로 가져오자. 세계인을 위한 한식 레시피이니 맛의 핵심만 추려 우리 한국인들의 기준으로는 아주 심플하게 작성되었다.



재료

: 간장 3, 고춧가루 2, 황설탕 2, 고추장 1, 맛술 1, 간 마늘 1, 1/2 참기름, 1/2 후추 / 삼겹살 혹은 목살 500g / 양파, 대파


순서

1. 모든 소스 재료들을 잘 섞는다. 상온에서 30분 또는 냉장에서 12시간 고기를 재운다.

2. 중불에서 기름을 두르고 준비한 양파와 대파의 일부를 투명해질 때까지 살짝 볶는다. 재워진 고기를 넣고 한쪽 면에 갈색이 날 때까지 흔들지 않는다.

3. 고기 한쪽 면에 색이 나면, 약간의 물을 넣고 전체적으로 4~5분간 볶는다.

4. 남은 양파와, 대파를 추가하고 불에 떼기 전 가볍게 볶아 완성한다.


몇몇 중요한 포인트가 숨어있긴 한데, 아무튼 레시피 자체로는 한국인인 우리에게는 매우 간단해 보이지 않나? 조리에 대한 부연 설명은 따로 필요 없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좀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레시피를 보면 머릿속에서 이런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떠올라야 한다.


재구성된 제육볶음 레시피

제육볶음의 맛 = 1 + 2 + 3

1.    <양념> = { (매운맛)-고춧가루, 고추장 + (단맛)-황설탕, 맛술 } + (부차적 재료)-간장, 간 마늘, 참기름, 후추

2.    <메인 식재료> = 앞다리살

3.    <서브 식재료> = 양파, 대파


이게 도대체 뭔 의미가 있냐 물으실 수 있는데, 먼저 이게 제육볶음이기에 망정이지 더 많은 재료들이 개입하는 복잡한 레시피는 금세 레시피의 포인트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헤매게 된다. 두 번째가 오늘의 주제에 맞는 중요한 이유인데, “어떤 재료가 맛의 핵심에 기여하는가”를 명징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이 요소들을 적절히 대체 또는 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드디어 한참을 숨죽여 기다렸던 우리의 보물이 등장한다. 딴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오늘 레시피의 제목은 이미 잊힌 지 오래일 듯하다. ‘세 단계 양파를 활용한 제육볶음’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우리는 오랜 시간이 묻은 양파가 뿜어내는 잠재력의 단맛을 고스란히 활용해 이 레시피에서 설탕을 대체한다. 이를 위해 1단계-흰 양파, 2단계-갈색 양파, 3단계-캐러멜라이즈 양파, 모든 단계의 양파가 한 요리에 사용된다. 이는 한 재료가 한 요리 안에서 여러 형태로 개입되어 각기 다른 역할로써 기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재료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다면, 한 가지 재료를 여러 얼굴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최종 레시피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 수정된 우리의 제육볶음 레시피

제육볶음의 맛 = 1 + 2 + 3

1.    <양념> = { (매운맛)-고춧가루, 고추장 + (단맛)-캐러멜라이즈 양파, 맛술 } + (부차적 재료)-간장, 간 마늘, 참기름, 후추

2.    <메인 식재료> = 앞다리살

3.    <서브 식재료> = 2단계 갈색 양파 + 양파/대파


너무 쉬운 레시피로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조리에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몇 가지 있다.



1. 소스의 균질화


보통 한국에서 양념장, 즉 소스는 여러 재료들을 단순히 섞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장이 이미 완결된 식재료이며, 동시에 주로 함께 사용되는 한국적인 재료들, 마늘, 고춧가루, 생강 외 각종 가루들이 우리에게는 추가적 열조리를 가하지 않고도 익숙하게 섭취하는 재료들이기에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여러 재료들이 만나 하나의 새로운 맛을 ‘창조’한다는 관점에서, 번거롭더라도 최소한 한번 균질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조리적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소스를 만들때는 귀찮아도 갈아서 사용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토머스 켈러였나, 어디서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프랑스 주방에서는 소스를 만들 때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잘 모르겠으면 한 번 더 체에 걸러라”.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비록 최종 맛에 큰 차이는 없을지라도 모든 재료를 한번 갈아 균질화하는 과정이 완성도에 작은 엣지를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도 고기에 양념이 잘 배려면 당연히 소스가 고르게 준비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 레시피의 경우 진득한 캐러멜라이즈 양파가 설탕을 대체해서 소스에 들어가는데, 단순히 섞는 것으로는 양파의 영향력을 온전히 소스에 고르게 퍼트리기 힘들다. 다진 마늘 조각이 군데군데 씹히는 걸 굳이 원하는 게 아니라면 소스나 양념은 고르게 갈아서 준비하자.



2. 마이야르 반응


중요한 마이야르 반응이 등장했다. 바로 고기에 색을 내는 부분이다. 볶음요리의 핵심은 강한 불에 빠르게 볶아 갈변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레시피에서도 총 쿠킹시간은 15분, 최초의 색깔이 난 이후 5분 안에 쿠킹을 짧게 마무리한다. 팬의 크기에 비해 고기나 기타 내용물이 너무 많거나, 팬의 온도가 충분히 높지 않다면 고기가 색깔을 내면서 ‘볶아지는 게’ 아니라, 색이 나기 전에 수분이 먼저 나와 ‘쪄지면서’ 익게 된다. 국물이 자작하거나 색이 나지 않은 제육볶음은 비록 볶음요리라 부르지만 조리의 관점에서 정확히는 ’ 조림’이다.


제육볶음은 '볶음'요리다



다른 중요한 포인트가 또 있는데, 첫 번째 색깔이 난 이후에 아주 약간의 물을 붓는 것이다. 아니, 고기가 쪄지는 걸 주의하라면서 갑자기 물을 왜 붓나 싶겠지만, 이것은 재워둔 고기 표면에 묻은 양념 때문이다. 색깔이 나면서 동시에 팬 바닥에 금세 양념들이 눌어붙어 타기 시작한다. 강한 열로 인해 고기보다 당분을 머금은 양념이 더 빨리 색이 나게 되는데, 소기의 목적인 고기의 ‘갈색’을 일단 얻었다면 인위적으로 수분을 개입시켜 쿠킹 템포를 늦춘다. 이 과정에서 추가된 수분이 바닥에 눌은 양념들을 다시금 녹여 고기에 결합시켜 맛을 더해준다. 이렇게 좋은 볶음요리는 말처럼 쉽지는 않으나, 요리의 정체성을 존중해 최선을 다해 ‘볶아’ 보자.



3. 양파들의 개입과 그 역할


오늘의 레시피에서 양파는 총 3번 개입된다. 첫 번째로 미리 완성된 캐러멜라이즈 양파는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등과 함께 갈아진다. 완성된 소스 맛을 보면 설탕처럼 전면에 앞서는 단맛이 아니라, 맵고 짠맛의 뒤를 잡아끌어 천천히 페이드 아웃시키는 은근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양념에 개입한 양파는 메인 식재료에 옷을 입히는 기초 단계부터 맛의 근원으로써 작동한다. 두 번째는 본 쿠킹의 시작 전, 원래의 레시피보다 시간을 조금 더 들여 갈색으로 충분히 볶아둔 2단계 갈색 양파다. 이 양파를 따로 뺴 뒀다가 고기가 색깔을 낸 시점 이후에 다시 추가한다. 이 상태의 양파는 최종 결과물에서는 고기와 다른 야채들과 함께 섞여서 그 형태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입안에서 가장 직접적인 단맛을 부여한다. 마지막 1단계 양파는, 생양파로써 애초에 고기와 함께 재워지는 시점부터 함께 한다. 짧은 쿠킹시간을 거치는 동안 조리가 끝날 시점에는 1단계 양파 정도로 모습이 완성되는데, 양파 볶음 같은 식감과 함께 야채로써의 은근한 단맛을 제공한다. Atomix의 레시피에서도 굳이 나처럼 길게 해설을 달지 않았을 뿐, 양파를 두 번에 나눠서 따로 조리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제육볶음은 ‘짠 요리’에 걸맞게 매콤한 염도를 가진 고기요리로서의 온전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매운 요리의 균형에 필요한 단맛은 레시피의 여러 단계에서 개입한 양파가 몰래 영향력을 뒤에서 행사하고 있다. “매콤 달콤”같은 첫 입에 동시에 들어오는 단맛이 아니라, 강렬한 매움을 은근한 단맛으로 부드럽게 저지하는 느낌이다. 정확한 이유를 대가며 설명하기는 힘든데, 설탕은 혀에 닿자마자 즉각적인 단맛을 주는 반면, 야채가 주는 단맛은 똑같은 ‘단맛’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혀에서 지각하는 시간차 때문인지, 개인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설탕보다 더 차분하고 우아한 뉘앙스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한식 레스토랑에서 발간한 레시피를 응용해 약간의 맛술 이외에는, 설탕 한 톨 들어가지 않고도 고급스러운 제육볶음을 완성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Atomix의 레시피는 세계인을 상대로 실용성을 위해 아주 간편하게 설계된 한식 레시피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설탕의 사용 그 자체를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양파만으로 단맛이 부족하다면 당연히 설탕을 첨가해 기호에 맞게 요리하면 된다. 오늘의 결론은 “세상 사람들 이것 좀 보세요. 설탕 안 쓰고도 제육 볶았어요”가 아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A4 한 장 분량의 레시피로 간단히 해결될 이야기다.




[레시피는 사회를 반영한다]


처음부터 오늘까지 긴 시간 우리가 나누고 있는 모든 대화를 관통하는 단 한 가지 화두는 “우리 식문화가 어떤 맥락 위에서 흐르고 있는가”이다. 레시피는 사회를 반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음식들의 이면에 어떤 논리가 흐르고 있으며, 그 논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아는 것은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단순히 “설탕을 많이 쓰면 음식이 후져진다.”같은 1차원적 주장이 아닌, 무분별한 설탕 사용이 야기하는 핵심 폐단은 맛이 아닌 식문화의 문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요리에 시간이 거세되어 가는, 사람 잡는 자본주의의 끝을 달리는 한국 사회도 언뜻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요리를 구조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만이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된 문제를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새롭게 설계할 수 있다. 그것이 레시피이건 설탕이건 식문화건 말이다.


양파와 제육볶음이라는 소재로 시간이 부여하는 가치니 뭐니, 거창하게 말하느라 나도 참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모든 미약한 모든 논의들이 결국은 ‘한식의 섬세화’로 흐르길 희망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한국에 ‘식재료 주인공 시대’의 지평을 여는 단초가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무슨 제육볶음 하나 하는데 혀가 이렇게 기냐, 나도 잘 모르겠다. 조치훈 9단의 명언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을 방패 삼아 글을 급하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전 07화 캐러멜라이즈 양파 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