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한국에도 분자요리가 있다.
여름이다. 감자가 맛있는 계절이다. 감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식재료 중 하나다. 영양 섭취의 관점에서 옥수수와 함께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인류를 기아에서 구원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그러나 못 먹어서 아픈 자만큼, 많이 먹어 아픈 자 또한 넘쳐나는 슬픈 오늘날 여전히 감자는 미식의 영역에서 그 가치를 한껏 빛내고 있다.
감자로 서양 미식사에 획을 그은 메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프랑스 조엘 로부숑의 시그니처 메뉴 ‘Pommes Purée’(감자퓌레)가 있다. 감자와 거의 비등한 양의 버터가 사용되는데 우유 등의 약간의 액체와 함께 오랜 시간 저어가며 버터의 지방을 온전히 감자에 흡수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재료와 세상에서 가장 풍만한 재료의 대등한 만남은 도대체 내가 감자를 먹는 건지 버터를 먹는지 헷갈리는 농밀함을 표현한다.
상대적으로 좀 더 가까운 시기에는 영국 헤스톤 블루멘탈의 ‘Triple Cooked Chip’을 들 수 있겠다. 우리가 익히 아는 프렌치프라이를 삶고, 말리고, 여러 번 튀겨내는 등 감자에 오만 짓을 다 하는데 그냥 맥도날드나 갈 걸 싶은 마음이 들 무렵 완성된 맛을 보게 되면 그 노력이 헛되지 않는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촉촉하고 포슬포슬한 내부와 완벽하게 창조된 크리스피 층의 대조감은 그의 말처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한 프렌치프라이’다. 이처럼 미식의 세계에서 감자는 어엿한 주인공으로써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요리를 어렵게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독자분들을 위해 감자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자면 우선 감자의 주성분은 수분을 제외하면 전분, 즉 탄수화물이다. 감자는 전분과 수분의 비율에 따라 점질과 분질로 나눈다. 전분의 함량이 높은(수분의 함량이 낮은)것은 분질감자이고, 상대적으로 전분의 함량이 낮은(수분의 함량이 높은)것은 분질감자다. 이 차이의 의미는 미식적으로 식감, 즉 텍스쳐에서 차이가 난다. 살면서 먹어본 모든 감자를 떠올려보면 어떤 것은 좀 더 단단하고 어떤 것은 부드러워 입에서 바스러지는 느낌을 겪어 봤을 것이다. 쉽게 말해 점질은 단단한 감자고, 분질은 포슬포슬한 감자다. 당연히 우열은 없다. 그냥 다를 뿐이다.
감자도 수많은 품종이 있는데 이 수분과 전분의 비율 또한 모두 다르다. 참고로 지금 이야기할 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고려해야 할 이슈가 하나 더 있다. 그 정도가 유의미한가 아닌가의 문제를 따져야 하지만, 감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식재료는 품종별로 각기 다른 고유의 ‘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향’은 곧 ‘맛’이다. 식재료의 품종 다양화가 중요한 이유이다. 좋은 요리사라면 수분과 탄단지를 이해하고 나면 그다음 단계에서 반드시 요리를 향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아무튼 이제 우리 눈에 감자는 이렇게 보인다. 이 방식은 비단 감자 뿐만 아니라 모든 재료를 바라볼 때 그 본질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감자 = 식감 + 맛
= (수분 + 전분) + (향)
당연히 한국에서도 감자는 널리 사랑받는 재료다. 모두가 알 듯 한국의 감자 주산지는 강원도인데 그 덕에 감자가 가진 전분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옹심이, 감자떡부터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강원도만의 멋진 토속요리들이 발전했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감자의 70% 정도는 과자 이름으로도 유명한 ‘수미’ 품종으로 점질감자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수분이 많고 단단하다. 하여 자연스럽게 이 품종에 적합한 조리법으로 한식에 사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국이나 조림 등 오랜 열 조리를 거치거나 또는 얇게 썰어 볶아 먹는 방식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예전에 나는 식문화의 관점에서 한국에서 야채는 요리 안에서 개념적으로 ‘맛’ 보다 ‘가니시’의 역할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었다. 감자의 경우 특히 애초에 그 수수한 향(맛)과 함께 오래 조리해도 모양이 유지되는 단단한 점질감자라는 특성으로 인해 한식에서 ‘가니시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대개는 국이나 찌개에 사용되며 감자조림, 감자채 볶음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의 식탁에 독립된 주인공으로써 오르는 경우는 은근히 찾기 쉽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내 눈에 독보적으로 빛나는 한국의 감자요리는 바로 ‘감자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감자전의 레시피는 강판이던, 믹서기던 일단 갈아낸 뒤 체에 밭쳐 수분을 빼고, 그 수분과 함께 나온 전분만을 가라앉힌 뒤 다시 간 감자와 합쳐서 팬에 지져낸다. 이 레시피는 간단하지만 음미할 지점이 아주 크다. 이 레시피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면, 감자의 고유한 구조를 ‘파괴’해 수분만을 제거한 뒤, 다시 감자를 감자이게 하는 요소들을 다시 묶는 ‘재창조’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는 스페인이 세계 미식계를 휘어잡는 계기를 마련한 엘 불리의 ‘분자요리’ 세계관과 정확하게 맥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분자요리’하면 액체질소나 드라이아이스 등을 활용한 화려한 주방 퍼포먼스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쇼맨십’이지 분자요리의 진의를 설명하지 못한다. 언어의 한계다. 이것은 페란 아드리아의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심지어 그는 그가 하는 요리를 ‘분자요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분자요리’가 말하는 것은 맛이나 특정 스타일이 아니라, 요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개념이다. 조리과학적 지식을 통한 재료의 본질적 이해를 통해 구성 요소들을 구조화한 다음, 그 요소들을 통제 때로는 비트는 작업으로 정의할 수 있다.
막상 먹어보면 별로 대단한 맛도 아닌 ‘분자요리’가 스페인이 프랑스를 넘어 세계 미식을 주도하는 미식국으로 올라서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요리는 단순히 ‘맛’을 넘어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요리가 본격적으로 예술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는 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감자전은 알고 보면 조리과학적으로 아주 ‘분자요리’스러운 음식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분자요리’ 감자전을 우리 방식대로 만들어 보도록 하자. 감자전의 맛을 떠올려보면 쫀득한 질감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감자를 한번 갈아서 수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감자의 향 분자들이 유실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수수한 향이 많이 사라지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감자전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감자채를 더해 제철 맞은 감자 본연의 맛과 향을 강조하는 동시에 추가적으로 크리스피한 식감을 더해보자. 이름은 '여름 감자전2.0'. 필자가 언제나 그렇듯 거 말은 한번 되게 있어 보이게 했지만, 결국 레시피는 너무나 간단하다.
제육볶음에 이어 오늘도 Atomix팀의 The Korean Cookbook을 펼쳐보자. 마침 감자전과 감자채 전이 붙어있다. 정말 심플하기 그지없는 레시피다.
[감자전]
재료 : 감자 200g, 연두(샘표식품) 1스푼
레시피 : 껍질을 깎아낸 감자를 얇은 강판에 갈고, 연두 한 스푼을 더해 섞는다. (갈아진 감자는 색깔이 빨리 변하므로 즉시 조리하도록 한다.) 중 약불로 달군 판에서 시작해 중불로 올려가며 전의 각 면을 1분 30초 정도 색깔이 나도록 조리한다.
아니 갑자기 이런 국제적인 레시피북에서 웬 연두가 튀어나오나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있겠다. 삼양의 주가 폭등이나 K-food의 뜨거운 열기 같은 소식이 자주 들리는 요즘, 사실 한식의 열기는 커머셜 영역 이전에 꽤 오래전부터 세계 미식계의 저변에도 흐르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뛰어난 요리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엘 불리의 정신을 잇는 바르셀로나 ENIGMA의 테이스팅 메뉴에도 연두가 사용된다. 그 유명한 알베르트 아드리아가 내 눈앞에서 연두를 붙잡고 에피타이저용 육수를 만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러니 여러분들도 연두나 조미료를 쓸 때 쓸데없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이 당당히 “야 세계적인 셰프들도 연두 쓴다더라” 하면 된다.
[감자채 전]
재료 : 감자 200g, 소금, 감자전분 1스푼
레시피 : 껍질을 깎아낸 감자를 아주 얇게 (2mm) 채친다. 볼에 채친 감자와 소금, 감자전분을 1 스푼의 물과 함께 젓가락으로 잘 섞는다. 중불에서 둥근 모양을 잡아가며 익힌다. 황금 갈색이 날 수 있도록 눌러가며 최대한 얇게 익힌다.
[간장소스]
재료 : 간장 1, 쌀 식초 1, 설탕 1 티스푼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기본 레시피를 레퍼런스로 활용해 우리만의 레시피를 만들어볼 시간이다.
[여름 감자전 2.0]
= 감자전 + 감자채 전
= (쫀득 식감 + 맛-소금, 캐러멜라이즈 양파, 연두) + (크리스피 식감 + 맛-감자향)
1. 적당량의 감자(2인 기준 4개)를 깎아 두 부분으로 나눠 준비한다.
2. 한쪽은 감자를 얇게 썰어 채쳐서 물에 담가 전분기를 빼서 준비해 두자. 채칼을 써도 좋다.
3. 다른 한쪽은 감자를 적당히 잘라 믹서에 갈 예정이다. 원래 감자전은 강판에 가는 방식이 감자의 식감을 남기고 좀 더 촉촉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경우는 감자채 전으로 바삭함을 따로 추가할 생각이니 지금은 감자전의 쫀득함만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믹서에 갈자. 옆에서 누가 딴죽을 걸면 좀 있어 보이게는 ‘텍스쳐의 대조감’을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면 된다.
4. 믹서에 갈 때 감칠맛과 단맛을 위해 우리의 보물 ‘캐러멜라이즈 양파’를 한 스푼 더해보자. 감자채 전에서는 오로지 식감만을 위해 다른 맛 요소를 넣지 않을 생각이니, 감자전이 주인공인 만큼 원하는 맛 요소들을 지금 넣어보자. 여기에 된장(!)을 첨가해 보는 것도 창의적인 방식이다. 나는 오직 감자의 순수함 만을 즐기고 싶다면 나중에 소금만 넣어도 나쁘지 않겠다.
5. 간 감자를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
6. 감자에서 빠진 수분에서 시간이 지나면 감자 전분이 밑에 가라앉는다. 위의 물만 곱게 따라버리고 바닥에 남은 전분과 함께 물기가 빠진 갈린 감자를 섞는다. 원한다면 여기서 위 레시피처럼 연두를 한 스푼 추가해도 좋다. 연두는 야채 발효를 통해 만든 액기스인데 야채의 특유의 감칠맛과 향을 부여한다. 마치 색깔이 투명하고 짠맛이 없는 간장 같은 역할을 한다. 감자전 믹스가 준비되었다.
7. 중불에 팬을 올리고 너무 크지 않은 크기(1스푼)로 감자전 믹스를 올린다.
8. 그 위에 채친 감자채를 적당히 올린다. (믹스와 감자채를 함께 섞으면 기대하는 식감이 나오지 않는다.)
9. 적절히 눌러가며 1분 30초 정도 후 뒤집어 색깔을 확인하고, 특히 감자채가 붙은 쪽에 예쁜 갈색이 나서 바삭바삭해질 때까지 잘 익힌다.
우둘투둘 모양은 순박하기 그지없지만 그 이면에는 (쓸데없이) 생각과 의도가 한껏 들어간 우리만의 감자전이 완성되었다. 따끈따끈한 감자전을 한 입 깨물면 강렬하게 구워진 감자향과 바삭한 감자채가 먼저 느껴진다. 이내 오늘의 주인공인 쫀득한 감자전이 들어오는데 감자의 수수한 맛에 무게감을 더해주는 양파의 옅은 달콤함과 야채의 향도 함께 느껴진다. 포인트는 하나의 재료가 표현하는 두 가지 텍스쳐의 대조감이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나름 여러 요소들이 밸런스와 존재 이유를 잘 갖춘 맛이다. 모르긴 몰라도 페란 아드리아도 반드시 좋아할 거다. 왜냐하면 스탭밀로 스페인 친구들 몇 번 해 먹여봤기 때문에.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오늘 우리는 감자전을 통해 스페인 패권 시대를 연 분자요리의 개념도 겸사겸사 구경해 보았다. 감자전의 컨셉을 이해하면 분자요리를 이해한 거나 마찬가지다. 감자전은 멋진 요리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맛으로만 따지자면 ENIGMA나 Disfrutar(2024 월드베스트레스토랑 1위) 같은 ‘분자요리’ 컨셉의 몇몇 메뉴보다 훨씬 낫다고 장담한다. 참고로 내 석사 전공 주제가 그들의 퀴진이었다. 믿으시라.
한국 대표 분자요리, 제철 맞은 감자전으로 장마철 빗소리와 함께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