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금아 Nov 01. 2024

그녀가 대답해 주었다





근래 들어 택시를 자주 이용한다. 손이 재지 못한 데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오면서부터는 집안일이 늦어져 오전에 외출할 때는 카카오 택시를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운전석에는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있다. 목적지를 확인하며 실내 거울로 뒷자리에 앉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짜고짜 “공기가 참 좋네요. 이 아파트는 값이 얼마나 가요?" 한다. 뜬금없어하는 모양을 알아차린 듯,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내 무릎에 놓인 책 제목을 묻는다. 


"나도 책을 쓰고 싶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엄마 얘기로요. 울 엄마 살아온 이야기는 태평양 바다도 못 담을 거여요.”


반응이 없자 대답을 재촉하듯 다시 나를 돌아본다.


“엄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린당게요. 시방도 요양병원에서 오는 길이에요. 이틀 일하고 쉬는 날엔 엄마한테 가요.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이 몇 날 며칠 머리 맞대고 회의해서 모셔다 둔 곳이어요. 피눈물 날 일이지요. 어메는 혼자서 아그들 일곱을 다 거둬냈어도, 그 많은 자식들은 엄니 하나를 못 모셔서 시설에 맡겼어요. 엄마한테 갔다 온 날은 너무 속상해요.”


내 고민이기도 해서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무심한 척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진한 사투리가 쏟아져 나왔다. 


“일곱 자석을 키워낸 내 엄마의 풍성하던 젖집이 마른나무 이파리가 되어부렀어요. 머시냐, 책 속에 끼워 둔 나뭇잎 맹키로 납작해졌당께요. 탱글탱글하던 젖꼭지는 낭구 끝에서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대추알 맨치로 되어부렀구요, 새끼들이 늘 임신 7개월이라고 놀려먹던 배는 폭삭 꺼져부렀어요. 장마 지나간 뒤의 둠벙 맹키로요. 아, 어쩌코롬 표현해야 하나? 머시당가, 그래요, 움푹 패인 허방! 온 땅이 다 허방다리랑께요. 


아들눔들은 쪼매 남아있는 밭고랑에만 눈을 파묻는당께요. 누릉밥 맹키로 눌어붙은 것을 조사묵꼬 팔아묵꼬. 그래도 냉개놓은 고것 땜시 포도시 찾아오는 갑소. 여섯 아들눔보다 한 뼘 밭뙈기가 효자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 당게요. 워메! 밥벌이할라치면 시간 맞추기 힘들다는 핑계 댐시로 올 때는 밀물 맹키로 떼로 몰려와요. 따따부따 증허게 씨월씨월 해쌌다가는 갈 때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부러요. 그래서 나는 늘 소리쳐요. 느그들 여그 머땀시 온겨? 엄니 뉘어놓코 계모임 하러 왔냐? 느자구없이! 기여, 아니여? 하고요. 아. 그런데 집이는…. 세상 편허게 산 인상이네요이. 문화원에 글 배우러도 댕기고요.”


“사는 게 다 그렇지요. 기사님은 개인택시까지 운전하니 멋집니다.”


“여자가 개인택시 몰라믄 사연이 얼마나 많았겠서라? 내도 한때는 옹통지게 살았어요. 아그들 셋도 초등학교는 다 사립으로 보냈고요. 대학교 부설 사립이요. 과외다 뭐다 밸시럽게 갤찼어요. 영어다 국어, 수학, 논술, 불어 선생까지 과외 붙였어요. 그란디 남편이 그 불어 선생 가시내랑 눈이 딱 맞아부렀어요. 일류대학 불문과 나왔다 캅디다. 긍께 말이요…. 내가 이제사 하는 소리요. 대학 간판이 뭔 소용이란 말이여, 사기꾼 맹글어 놓는디.”


“그래서 지금은요?” 


“그라제마는 어쩌겄소? 끄끕해도 살살 달갤 수밖에요. 새끼들을 한 개도 여우지 않았는디, 내가 보둠어야제. 오무락달싹 못하게끔 재산 다 줄 테니 비켜달라고 싹싹 빌면서 애원했지요, 그놈의 사랑, 앵간히 질깁디다. 다 줘버렸어라, 남편 찾아올라믄 어쩌겠어라? 앙꿋도 안 냄기고 다 주어부렀어요. 그라드라도 죽으라는 법은 없데요. 그 와중에도 머리가 돌아갔던지 개인택시를 샀어요. 뭔일이었던지 몰라요. 지금 이 차예요. 우리 남편요? 무쟈게 좋은 사람이었어요. 양반이고. 금실은 또 얼마나 좋았는데요, 한 발짝만 나서도 손잡고 팔 붙들고 댕겼당게요. 길 가다가도 어깨동무하고 스킨십하고…. 다들 부러워했어요.”


저만치에 문화원 건물이 보였다. 나는 조급해졌다. 


"아, 어머니는요?"

"내가 딸인디 어쩌겠어라?”


차 문을 여는 내게 그녀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내가 어물어물하는 사이, 차를 빠르게 돌리며 차창 너머로 소리를 질렀다.


“전화 한 번 줘요. 엄마 요양원 갈 때 같이 타고 가면서 속에 있는 이야기 원없이 해불랑게요.” 


마음 같아서는 수업을 빼먹고 그녀와 동행하고 싶었다. 그날의 수업 교재였던 <2019 올해의 문제 소설> 한 편을 절정에서 읽다 만 느낌이었다. 그녀의 아픔은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향한 듯 보이지만, 이면에는 고명딸로서 어머니에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죄책감과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위로하는 애달픔도 있을 것이다. 차에 오르자마자 아파트값을 물었던 이유도 공기 좋은 곳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생을 함께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내 이야기였다. 아들이 아닌 딸이 여섯이라는 것을 빼고는 소재도 주제도 갈팡질팡하는 구성도 똑같았다. 나 역시 병세가 심해지는 친정어머니의 거처를 정해야 할 입장이었다. 형제 중 누군가는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하고, 누군가는 우리 손으로 돌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는 맏이인 나의 결정을 기다리던 터였다. 나라고 뾰족한 방도가 있겠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던 터에 그녀를 만났으니 그녀가 한 모든 말은 내가 경청해야 할 충고였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나는 아직도 서성이고 있다. 모니터 아래에 붙여둔 명함이 말을 건넨다.


“나, 꼭 책을 써야 해요. 참말로, 시간 내서 전화 쫌 꼭 주씨오이.”





작가의 이전글 놀란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