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내리면 섬은 옥빛에 잠겼다. 하늘과 바다와 집터와 뒤란, 대나무 숲과 바람과 별…. 그리고 첫 사내 동무의 얼굴이 내 기억의 유리 필통 속에 푸른빛으로 담겨 있다.
아버지는 늘 삼천포 오일장에 갔다. 장터에서 사 온 물건들은 어구와 생활용품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특이한 것도 있어서 숨죽여 장바구니 속을 들여다보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해의 어느 날이었다. 필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한 뼘 조금 못 되는 가로에, 세로가 두어 뼘 정도 되는 넓적한 유리 필통이었다. 뚜껑에 여러 개의 오목렌즈 같은 것이 달린 푸른 바다색 이 층 필통이었는데 아버지는 학교 갈 때 주겠다며 장롱 위에 올려놓았다.
어른과 아이를 다 합해도 백 명이 안 되는 작은 섬이었다. 내 또래라고는 동갑내기 돌이와 귀남이, 세 명이 더 있었고 위아래로 예닐곱 명이 있었다. 동갑 중에 남자아이는 돌이뿐이었다. 바다와 감풀, 섬길…. 온 섬이 놀이터였다. 섬 꼭대기에 있는 산밭에서도, 갱변*에서도 아이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다는 제일 좋은 놀이터였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갱변으로 갔다. 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새로운 놀이를 만들었다. 모여 재잘거리는 소리는 세상 하나뿐인 이야기가 되었고, 노래가 되었다. 숨바꼭질할 때면 갱변은 아이들 소리로 쩌렁쩌렁했다.
꽁- 꽁- 숨어라, 귀때기가 보일라
꽁- 꽁- 숨겨라, 발가락이 보일라
뻘뚝게가 고추를 물어도, 꼼짝 말거라
성게가 똥구멍을 찔러도, 꼼짝 말거라
해가 쨍쨍한 날이면 오줌누기놀이를 했다. 비렁** 위에서 오줌을 누면 오줌 줄기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바위를 타고 흘러갔다. 오줌이 바다까지 닿으면 백 살까지 살고, 멈추면 일찍 죽는다며 내가 오래 사느니, 네가 더 오래 사느니 실랑이를 벌였다. 입씨름으로도 판가름 나지 않으면 미역을 끌어다 오줌 길이를 재느라 시끄러웠다. 또 오줌이 만나면 누가 누구랑 결혼한다고 하고, 새 줄기를 만들면 아이를 낳았다고 하며 빨갛게 익은 얼굴로 깔깔댔다. 내 오줌은 돌이의 오줌과 만나 몇 개의 줄기를 내며 바다로 흘러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돌이는 빨개져서 집으로 가 버렸다.
나이가 들면서는 해녀놀이나 낚시놀이를 했다. 돌이는 전복 따기 대장이었다. 크고 좋은 전복은 내 바구니에 담아 주곤 해서 어머니께 드리면 그날 저녁 할아버지 밥상에 올랐다.
돌이가 전복을 따는 동안, 아이들은 고기를 잡았다. 노끈에 잇갑***을 달아서 바다에 내리면 볼락과 노래미 같은 고기들이 놀란 눈을 뜨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잡은 고기는 통발에 넣고 놀다가 심드렁해지면 놓아주었다. 고기들은 물속에서 몸을 한 번 파르르 떤 다음, 헤엄쳐 갈 방향을 생각이나 하듯이 잠시 멈췄다가는 꼬리지느러미를 세차게 흔들며 바닷속 저편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때쯤이면 아이들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군가 풍덩! 하고 바다로 뛰어들면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나는 숨을 최대한 참아가며 바닷속 보기를 좋아했다. 놀란 참게가 옆걸음질 치며 돌멩이 밑으로 몸을 숨기면, 춤사위를 펼치던 문어는 다리를 모은 채 화살표 모양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놀란 파래들은 소스라쳐 더욱 파래졌다.
멱을 감다 추워지면 비렁에서 몸을 말렸다. 파도에 닳아 반질반질한 바위는 갱변에 내리쬐는 햇살로 따끈따끈했다. 옷을 널어놓고 옆에 배를 깔고 누우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바닷가에 널린 미역귀는 맛있는 간식거리였다. 오도독오도독 미역귀 씹는 소리에 옷은 금세 말랐다. 아이들은 비렁 위를 기어가는 갯강구를 잡느라 또 물에 빠지면서 한나절에도 몇 번씩 옷을 적셨다 말렸다 했다.
갱변은 한 번도 같은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암만 파헤쳐도 하룻밤만 지나고 나면 새 얼굴로 맞았다.
어느 날이었다. 잔치가 있었던지 어른들은 한복을 차려입고 육지로 가고, 섬에는 아이들만 남았다. 그날은 바닷물이 많이 빠져서 감풀이 넓게 드러났다. 개불과 전복, 성게가 손으로 줍듯이 잡혔다. 갱변에 엎드려 정신없이 주워 담았던 것 같다.
“뛰어!”
돌이의 고함에 고개를 드니 커다란 밀물 더미가 코앞에 와 있었다. 엎어지고 넘어지며 달렸지만 갱변의 끝은 저만치에 있었다. 옆에 있던 큰 바위로 올랐다. 바위는 끝부분만 남기고 물에 잠겨 버렸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바다에는 한 척의 고깃배도 지나가지 않았다. 내가 울자 귀남이가 울고, 돌이도 울었다. 울음 메아리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귀신 소리 같아 꾹 삼킨 채 벌벌 떨고 있는데 어른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야아! 돌아! 귀남아!”
바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집에 다다랐을 때의 기억은 또렷하다. 돌이가 망태기를 열어 무언가를 건네려고 할 때였다. 집안에서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안 들어오고 뭘 꾸물거리노?”
달빛에 돌이의 겁에 질린 얼굴이 비쳤다. 돌이는 전복을 꺼내어 주고 자기 집 쪽으로 달음박질쳐갔다.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전복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밖에 나갈 수 없었다. 돌이도, 어머니와 너나들이하며 일을 돕던 돌이 아지매도 오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불러 앉혔다.
“니는 인자 삼천포에 있는 핵교로 갈 끼다. 할바시, 할매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대이.”
두 개의 입학선물을 받았다. 유리 필통과 함께, 문밖출입이 허락되었다. 그래도 놀 수 없었다. 섬길에서도 갱변에서도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다.
삼천포로 가기 며칠 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돌이 네로 갔다. 돌이 아지매와 어머니는 자꾸 눈물을 찍어냈다. 다음날, 아지매는 우리 집에 다시 왔다. 돌이도 왔다. 필통을 보였다. 뚜껑에 돌이의 부러워하는 눈빛이 가득 떴다.
며칠 후, 아버지를 따라 삼천포로 갔다. 할머니 집에서의 시간은 길고 지루했지만, 꾹 참았다. 방학 때 부모님과 섬 아이들을 만나면 ‘수’가 가득 담긴 통지표를 보여 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밤이 되어 심심해지면 필통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필통 뚜껑에 달린 오목렌즈에 수십 개의 달이 뜨고, 내 얼굴이 떴다. 내 필통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여러 개로 만들어 주었다. 처음 필통을 보던 날, 신기해하던 돌이의 눈망울까지도.
방학 날, 도선에서 내려 개똥이 할매집을 지나면 담벼락 밑에서 돌이가 걸어 나왔다. 돌이는 히죽이 웃어 보이고는 말없이 집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그 애의 손끝에서 잇갑을 담은 ‘남양분유’ 깡통이 출렁거렸다. 나의 짧은 몽키 커트 머리와 빨강 멜빵 가방도 덩달아 찰랑거렸다.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날은 개똥이 할매집 돌담을 지나도 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까지 가도 없었다. 마루에 가방을 던져놓고 돌이네로 갔다. 그애네는 우리 집을 지나 섬 오른쪽 맨 끄트머리에 있었는데 돌이 아버지가 문둥병 환자가 되면서부터 살았다. 돌이는 방에서 화투패를 펼치는 아저씨 곁에서 시중을 들곤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돌아!” “돌아!” 마당 잡초들이 빈 대답을 보내왔다. 집으로 와 저녁도 먹지 않고 방에 누웠는데 밖에서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돌이네는 부산에서 잘 사능가 모르겄네.”
“섬사람이 도회지에서 벌어 묵꼬 살라 카모 힘들 낀데….”
그날 밤, 식구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돌이 네로 갔다. 필통을 들고서. 사리 때였던 것 같다. 한달음에 달려가던 흙길이 바닷길이 되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바당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속은 푸른 유리 필통 같았다. 바닷물 위로 여러 개의 달이 떴다가 사라졌다. 납작 엎드린 돌이네 초가 마당에 이르자 달은 하늘에 올랐다.
조개껍질과 사금파리가 뽀얗게 돋아난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갔다. 달빛이 벽에 걸린 돌이의 전복 망태기를 푸르게 비추었다. 망태기 속에 가지고 간 필통을 넣었다. 돌이가 오면 열어 보기를 빌며. 부엌을 나와 방 앞에 섰을 때였다. 환청인 듯, 잠꼬대가 들려왔다. 부산에서 학교 운동장을 맘껏 달리는 돌이의 꿈소리가.
그해 여름, 나는 갯바람을 맞으며 신섬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돌이와 멱감던 날, 먹이를 찾아 뜨거운 비렁 위를 헤매던 갯강구처럼.
* ‘바닷가’의 경남 방언
** ‘바위’의 경남 방언
*** ‘미끼’의 경남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