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3코스, 남원 바닷길을 지날 때였다.
맞은편에서 중년 여인이 손수레를 끌고 오고 있었다. 노을에 반사된 얼굴에서 금빛이 났다. 한 발치쯤 다가왔을 때 그녀가 불쑥 귤을 내밀었다. 손에 쥐여주는 것만으로 모자랐던지 등 뒤로 가서는 내 배낭을 열어 꾹꾹 눌러 담기까지 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뜨악했지만, 거절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모습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귤밭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녀는 목이나 축이고 걸으라며 이번엔 귤을 까서 내밀었다. 그냥 받기에는 많았다. 값을 치르겠다고 했더니 자신도 얻었다며 “그냥 먹읍써.” 한다. 갈 길이 멀었지만 나도 배낭에서 커피를 꺼내어 건넸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가본 적이 없단다. 제주에서 태어나 딱 두 번 섬을 떠나 보았다고 했다. 엄마 등에 업혀 귤밭에 다니기 시작했고, 걸음마를 배우면서부터 귤 따기를 배워 평생을 귤밭에서 살았단다. 고기잡이배를 타는 남편은 바다에 살다가 집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온다고 했다. 자신은 아침 일곱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일하고 육만 원을 번다며 오십 넘은 나이에 그만한 벌이가 어디 있겠냐며 사람 좋은 낯빛으로 웃었다.
그녀에게 반듯한 귤밭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귤밭이 있느냐?”고. 그런데 뜻밖에도 “어서 마씸!” 한다. 그 말에 나는 난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왜 없어요?”
씩씩한 그녀도 당황했던지 머뭇거렸다.
“아, 우린 날 때부터 어섰주.”
죽비에 맞은 듯했다. ‘유마의 침묵’이라 했던가. 짧게 말했을 뿐인데 많은 말이 귓전을 울렸다. 그녀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바다와 귤밭에서 번 돈으로 삼 남매를 길러냈고, 지금도 부부가 몸 하나로 벌어먹고 살 수 있으니 더없이 고맙단다. 그런데 그녀의 말은 들을수록 궁금증이 더해졌다.
“바다에서고 땅에서고 평생 남의 일만 해주고 살면 속상하지 않나요?”
황당했던 모양이다. 갯바람에 쿨럭쿨럭하면서도 조목조목 덧붙였다.
“나(내) 밭이 이시문(있으면) 좋주마심(좋겠지요). 경해도(그래도) 지금도 좋주(좋아요). 귤낭이(귤나무가) 주인 얼굴도 모르주(모르지요). 농약 쳐주멍(쳐주고) 비료 주멍(주고) 열매 따주멍(따주며) 버치게(힘들게) 보살피난(보살펴주니까), 나(내)가 어멍이주(엄마이지요). 황금향, 레드향, 천혜향, 카라향, 새또미……. 다 나(내) 아덜이고(아들이고) 똘이라 마씸(딸입니다). 노지 귤* 끝나민(끝나면) 가온 귤** 키우멍(키우면서) 하우스에서 귤낭(귤나무) 조끄띠(곁에) 살암주(살지요).”
갯쑥부쟁이며 갯채송화, 무장다리 꽃이 세찬 바닷바람에 목을 가누며 피어나고 있었다. 하필이면 왜 이 자리냐고 탓하지 않고 담담히 꽃대를 밀어 올리는 모습이 고단한 삶의 자리에 바투 붙어 있으면서도 웃음꽃을 피워내는 그녀 같았다.
기침을 할 때마다 장독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옴니암니 말을 이어갔다. 싸락눈이 세차게 뿌리기 시작했을 때에야 갈 길이 생각난 듯했다. 큰 눈이 내리면 귤낭이 더 큰 냉해를 입을까 걱정이라며 당장 귤밭으로 가 보아야겠다고 하면서도 귤 몇 개를 더 주었다. 나는 귤을 받아 든 손이 시린 것도 잊은 채 그녀가 걸어 들어간 올레길 입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야말로 참 부자였다. 평생을 귤밭에서 일하고도 귤나무 한 그루 갖지 못했지만 귤낭을 돌보는 자신이 어멍이라고 믿고 살아가니, 중생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구부득고求不得苦의 번뇌에서 해탈한 자유인이었다.
그해 일월은 유난히 추웠다. 백 년 만에 찾아온 추위라고들 했지만, 많은 것을 가지고도 탐하느라 더 가난했고 더 추웠던 것 같다. 의지했던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걸었던 제주 올레길이었다. 그 소박한 길에서 얻은 빛나는 경구警句를 떠올리면 따뜻해지고 부요해진다.
“우린 날 때부터 어섰주.”
*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귤
** 온도를 높여 수확한 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