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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금아 Nov 01. 2024

곰피






이른 봄, 포구는 숨비소리로 가득하다. 겨울을 넘어온 파도들은 바위틈에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고, 먼 길을 달려왔을 곰피*는 너울을 타고 몸을 푸는 중이다. 북해도 곤부박물관에서 보았던 홍보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원시의 난바다를 향해 돌진하던 수백 척의 통통배들. 키를 몇 곱절 넘겨 자라난 곰피를 건져 올리느라 있는 힘을 다해 용쓰는 어부의 일그러진 얼굴이 오버랩된다. 곰피가 갑판에 오르는 순간, 필름은 멈추었다. 검은 화면에는 거친 심장 박동만이 큰 울림으로 남았다. 그 속에서 귀에 익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향 집 부엌 모퉁이에는 오지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 보면 곰피가 몸을 풀고 있었다. 어머니는 봄이면 바다에서 곰피를 캐다가 말려서는 그물 망태기에 담아 걸어두고 사시사철 반찬으로 상에 올렸다. 물에 불려 멸치 젓국과 함께 쌈으로 내놓거나 고추장과 식초를 넣어 무치면 온 식구가 좋아했다.


아침이면 곰피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가 이불 밑으로 들려왔다. 발막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뒷등‘새미’에서 길어 온 물을 새 물로 가는 소리였다. 섬에는 먹을 물조차 부족했다. 너울이 심해 섬에 하나밖에 없던 그 샘마저 파도에 잠겨 곰피에 부을 물조차 없는 날이면 항아리 바닥에서 숨비소리가 올라왔다. 


깊은 산골 처녀였던 어머니는 열아홉에 섬 색시가 되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작은 섬이었다. 홀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어머니에게 외할머니가 “부잣집에 가서 편히 살라.”며 보낸 시집이었다. 어머니는 혼례를 마치자마자 할아버지의 명령으로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고조부모님을 모시며 아버지를 도와 어장일을 했다. 집안일에 밭일에 끝이 없었다. 


깜깜한 새벽이면 섬 외딴곳에 있는 발막으로 염포를 하러 갔다. 아버지가 죽방에서 잡아 온 멸치를 삶아 몽돌밭에 너는 일도 힘들었지만, 염포에 쓰인 도구들을 간수하기란 가늠키 어려운 노역이었다. 멸치를 담았던 대소쿠리를 바닷물로 씻으면 시린 물이 허리까지 차오를 때도 있었다. 성사(聖事)였을까. 어린 어머니는 매일 새벽, 곰피처럼 바다에 육신을 담그는 의식을 치르고서야 하루를 열 수 있었다. 


십여 척이나 되는 뱃사람들의 먹거리를 감당하는 일도 어머니 몫이었다. 반찬을 만들어 파는 가게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우리 집 마당은 늘 부식공장 같았다. 어머니는 조선소로 어판장으로 음식을 해다 날랐다. 배들은 고기잡이를 떠나면 보름 정도를 바다에서 보냈다. 배 한 척에 십여 명의 선원들이 탔으니 층층시하 식구에 일꾼 아재들까지 얼마나 많은 음식을 장만해야 했을까. 


김장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물과 소금을 아낄 방편이었을 거다. 집 앞 갱변**에 그물을 쳐 놓고 수백 포기의 배추를 쪼개어 담가두면 바다는 노란 꽃밭이었다.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지날 때면 뉘누리가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였다. 너울이 밀려올 때마다 파도는 배춧잎 갈피에서, 어머니의 무르팍에서 흰나비 떼가 되어 하르르 날아올랐다. 


푸른 물이랑 가에 앉아 거친 바다 밭을 매시던 어머니.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면 유년의 바다를 아름다운 수채화 한 점으로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억 속 바다는 선연한 멍 빛이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바위를 부딪는 파도의 멍 같은. 제 몸을 부수며 길을 열어가는 파도처럼, 어머니도 당신의 몸 하나로 한 번도 닦여진 적 없는 바다에 길을 내느라 멍투성이가 되었다. 


초봄, 배들을 바다로 보내고 나면 어머니는 먼바다로 곰피를 따러 갔다.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순해지고, 파도 갈피에서는 연둣빛이 설핏했다. 물 길러 가거나 육지에 있는 장에 갈 때를 빼고는 섬을 떠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며칠 곰피 캐는 날은 해방이었다. 섬 여인네들과 집 앞 갱변으로 조개 잡으러 갈 자유조차 없었다니…. 긴 장대를 들고 마당을 나서는 어머니의 볼에는 광채가 돌고 분내가 났다. 동동구리무를 바르고 박가분이라도 두드렸을까. 


곰피가 자라는 곳에 이르면 너울이 심한 날에는 배 안으로 파도가 들어왔다. 한 손으로는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다른 손으로는 장대 갈퀴로 곰피를 캐다 보면 바다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런 날 밤이면 어머니는 깊은 잠을 잤다. 몇 번이고 어머니를 불러 젖히던 고조할아버지의 곰방대 두드리는 소리도 어머니를 깨우지 못했다. 이튿날이면 집 안팎 곳곳에 곰피가 널렸다. 담장에서, 마당에서, 바닷가 비렁에서 곰피 마르는 소리가 해풍 속에서 달았다.


곰피 캐기가 끝나면 집안에서는 더 큰 너울이 일었다. 어장일을 몸으로 한다면, 집안일은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두 시동생과 세 명 시누이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장남을 남편으로 둔 아내 자리였으니 어머니의 속내는 너울 속이었을 거다. 어머니의 몸에도 파도가 저장되었던 모양이다. 드팀없던 겉모습과는 달리 섬을 도망칠 궁리만 했었다니. 또바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단다. 그러나 달 없는 밤이면 깜깜해서, 달 뜨는 밤이면 달빛이 밝아서 배를 띄우지 못했노라 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 곰피 항아리의 물을 갈며 하루를 젓는 순간부터 늦은 밤, 그물바늘을 쥐고 쪼그려 잠들기까지 한시도 마음에서 노(櫓)를 놓은 적이 없었을 테다. 


산골에서 잉태된 포자(胞子)씨 하나가 깊은 바다에 속절없이 떨어졌을 날을 떠올려 본다. 뿌리내림의 시간이었을 거다. 한갓 바다 식물인 곰피에게나 사람에게나 낯선 땅에 뿌리내리기란 무수한 흔들림을 견뎌내는 고행이었을 터. 포자는 간신히 바닷속 바위를 열어 흙 한 줌 없는 그곳에 뿌리를 심었을 거다. 


옹기 가득 물을 채워 여행지에서 사 온 마른 곰피를 담근다. 고물고물 오그렸던 심사를 풀고 보니 구멍이 숭숭하다. 쉴 새 없이 드나들던 파랑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던 흔적이다. 해대(海帶)라는 또 다른 이름이 말하듯 곰피에는 바다의 한 생(生)이 담겨 있다. 


섬 각시가 된 지 육십 년, 어머니는 몸 여기저기에 구멍 숭숭한 한 포기 곰피가 되었다.




 *다시마목 미역과의 여러해살이 해조류.

**바닷가마을에서 작은 해안가를 이르는 말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발표지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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