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반에 새 수강생이 들어왔다. 초등학교에서 방과후교실을 지도하는 교사였다. 화장기라고는 없는 거친 피부에 가선진 얼굴이었지만 웃음을 함빡 머금은 표정이 주변을 환하게 했다. 글 쓰는 일에는 통 소질이 없지만,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겨서 찾아왔단다. 먼저 도움을 구할 일이 있다며 출근 시간에 맞추려면 수업 중간에 나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방과후 돌봄을 해온 지 5년째라고 했다. 탈 없이 재미있게 해 왔는데 걱정이 생겼단다. 1년 전부터 맡게 된 아동 때문이었다. 엄마 없는 가정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아인데 정규수업 동안에는 또래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만 지내다가 방과후 시간이면 매일 그림 편지를 써서 준단다. 처음에는 자신도 글과 그림으로 잘 대답해 주었지만, 지금은 아이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에 벅차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스마트폰을 열어 보였다.
폴더에 담긴 글과 그림을 보는 순간, “영재다, 영재!” 소리가 절로 나왔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탄성은 사라지고, 마음 한구석이 우릿해졌다. 아이가 지었다는 시는 동시(童詩)가 아니라 어른이 쓴 시(詩)에 가까웠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데도 혼자 한자를 익혀 쓴 것이나 과학 지식을 곁들여 표현한 것까지, 놀라웠다.
선생님과 엽록소(葉綠素)
〇〇〇
葉綠素(엽록소)는 나뭇잎의 자체다.
선생님은 사랑의 자체이시다.
엽록소와 선생님은 같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마음은 그렇다.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였다. 천방지축 부룩송아지 같을 때련만 처지를 안추르며 말을 꾹꾹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라면 만물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할 나이 아닌가. 그런데 오래 살아온, 잘 살아온 어른 같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이 함께 살아가려면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세상살이의 지혜를 다 깨우친 듯했다. 아이가 어른들의 감바리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글에서는 어른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듯한 마음새도 보였다. 어린아이가 겪었을 상처가 오죽했으면 그럴까 싶어지면서 만난 적 없는 아이의 모습이 서물거렸다. 어떤 작품에서는 세 살 때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단념한 듯한 울음 빛이 설핏했다.
스무 편 정도의 시화(詩畵)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어가 있었는데 ‘사랑’과 ‘선생님’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방과 후 시간이면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애오라지 읽고 쓰고 그리는 일에만 매달리며 새끼 새처럼 선생님 곁을 뵤뵤 돈다니 허기진 사랑의 자리를 선생님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몸짓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맡겨진 열여섯 명의 아동을 골고루 돌봐야 하지만 자꾸만 그 아이에게로 마음이 가버려 미안하다고 했다. 결손 가정과 극빈 가정,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엄마와 생이별을 겪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있겠느냐며 눈자위를 붉혔다. 엄마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주고 싶은데, 그러자면 아이를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에게는 아이의 속내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것 같단다. 알아듣는다고 해도 느낌을 표현하기는 더 어려울 것 같아 고민 끝에 글쓰기를 배우기로 했단다.
그녀는 양해를 구한대로 수업 종료 20여 분을 남겨놓고 강의실을 나섰다. 제 자식 키우는 일도 두 손 들어버린 부끄러운 어른들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즈음, 남의 자식을 온 마음으로 보듬으려 애쓰는 그녀는 아이가 시에서 쓴 대로 분명 ‘사랑의 자체’이고, 세상 숲을 광합성할 ‘엽록소’임에 틀림없다.
미세먼지 경보가 내린 듯 온 세상이 뿌옇지만,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큰 숲에 든 듯 눈이 맑아진다.
아이가 그려서 선생님께 보낸 그림과 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