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처음 움직임을 인식했을 때는 꿈인 줄 알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검은색뿐이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집이어도 미세한 형태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지는 않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안다. 꿈으로 알았던 사실은 새벽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점차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로 다가갔다. 모든 촉각은 섬세하게 받아들여졌다. 어제 친구들의 파티 이후 벗지 않고 잤던 슈트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다른 감각들도 매섭게 살았고 오직 눈만이 자신의 일을 하지 못했다. 수 없이 봐온 나의 방안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었다. 등골이 서늘해져서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 거울과 마주 보고 싶었다. 연신 눈을 비비며 벽에 손을 대고 천천히 걸었다. 전선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벽을 향해 강하게 손을 뻗어 넘어지지 않게 버텨 겨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를 붙잡고 거울을 더듬었다. 물을 틀고 손바닥에 고이는 물을 얼굴에 끼얹고 거울을 쳐다봤다. 깜빡이는 눈꺼풀이 느껴졌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찾았다. 잠금을 풀었지만 어떤 버튼이 눌리는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 도움을 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관으로 갔다. 어제 벗어던진 구두를 찾는데 한 짝을 찾지 못했다. 신발장에 아무거나 잡히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눈 밑에 가득 눈물이 고이는 게 느껴진다. 두렵다. 멀리서 또각 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양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고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잠시 앉자고 제안을 했다. 근처에 있는 앉을 만한 곳에 나를 앉혔다. 잠시 통화를 하더니 구급차를 불렀다. 그녀는 나의 집이 어딘지 물어봤다. 나는 이 근처라고 대답을 했고 밖은 위험하니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여러 번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옆자리에 그녀가 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하면서 약간 어린 느낌이 났으며 아까는 몰랐던 화장품 냄새가 진하게 났다. 나의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손에 얇게 뻗은 뼈가 느껴졌다. 반지는 끼지 않았고 매니큐어가 발린 듯 손톱이 반들반들했다.
"미안해요. 어디 가시는 길이 었을 텐데"
"괜찮아요. 아직 시간은 많은 걸요."
"근데, 119에 저희가 있는 곳에서 집으로 왔다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네요. 근데 집 앞에서 전화했으니깐 아마 근처에 오면 소리가 날 거예요. 그때 제가 나가볼게요."
"아, 네"
그녀가 나의 손을 뒤집는 게 느껴졌다.
"손이 이쁘네요."
"그런가요?"
"기다리기 심심한데 제가 손톱을 칠해드려도 될까요?"
갑자기 손톱을 칠해준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칫 잘 못 보여서 기분이 상하면 더욱 곤란한 일이 생길 테니 구급차가 오는 동안에는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코를 찌르는 매니큐어 냄새가 났다.
"무슨 색이 좋아요?
"저는 아무 색이나 다 괜찮아요."
"그래도 골라보세요."
"그쪽은 지금 무슨 색을 칠했어요?"
"저는 검은색이요."
"그럼 저도 검은색으로 칠해주세요."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다. 손톱이 빠질 듯 아프게 솜으로 손톱을 닦아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천히 손톱을 칠했다.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면서 시원하게 매니큐어가 발려지는 손톱을 느꼈다.
"그거 아세요? 매니큐어에는 포름알데히드라는 발암성분이 있대요. 소량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몸에 좋지는 않겠죠? 이렇게 이쁜데 말이에요."
그녀가 나의 손톱에 입 바람을 불었다.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죽이기 위해서 독살에 많이 사용했대요."
"그랬나요?"
"저도 믿기지는 않지만 궁금하네요. 정말인지, 정말 매니큐어에 독을 듬뿍 넣어서 칠하면 사람이 죽을지."
"그 실험이 저인 건 아니죠?"
겁먹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농담이었다. 이야기를 하자니 점차 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하는 것 같았고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상상 속에는 마녀처럼 변했다. 나는 빨리 지금 이 순간이 끝나길만을 바랬다.
"땀이 많이 나네요."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주었다.
"119가 많이 늦네요."
"그러게요."
무관심한 말투다. 정적이 흘렀고 소름이 끼쳐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질문을 했다.
"혹시 저를 아시나요?"
"글쎄요?"
"제가 어떤 잘 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죄송해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아리송한 대답에 극단적인 상황까지 상상하게 됐다. 그녀를 힘으로 제압할까도 했지만 가방 안에 만약 뾰족한 물건이 있다면 오히려 내가 당할 테고 만약 제압을 한다 해도 목격자가 봤을 때 남자인 내가 처벌받을 확률이 높았다. 불리한 상황이다. 차라리 손톱이 다 칠해지는 순간이 오지 않길 바랬다. 서늘한 말을 던지는 그녀지만 손톱을 칠해주는 지금 만큼은 얌전하고 부드러웠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버티기로 했다.
"마지막 손톱이에요."
사형선고 같았다. 손톱이 다 칠해지면 나는 무슨 일을 당하는 거지? 아니면 벌써 이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가 그녀가 말한 독이 발라져 있어 곧 죽는 건가? 숨은 더욱 쉬기 힘들었고 셔츠가 강하게 목을 조였으며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눈물은 콧물이 되고 콧물은 눈물이 됐다. 내가 우는 소리 사이에 그녀의 작은 피식거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꾸 움직이지 말아요. 못 바르겠잖아요."
그래도 상관없다. 차라리 끝나지 않길 바란다. 살려달라고 떼를 쓰듯이 울었다. 그때 복부에 강하게 충격이 왔고 숨이 멈춰버리는 고통과 함께 온몸이 저렸다. 소파에 앉아있지 못해 앞으로 꼬꾸라져서 방바닥에 차가운 느낌이 얼굴을 덮쳐왔다. 강하게 땅에 박힌 왼쪽 귀는 이명 소리가 들렸으며 오른쪽 얼굴은 그녀의 손바닥이 지나갔다. 그리고 차분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착하게 사세요."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집에 들어왔었는지 또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고 나는 몇 분간 몸부림을 치다가 멀리서 들리는 구급차 소리에 안심을 하고 잠에 들듯 기절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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