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없는 불행만큼 불행한 게 있을까요? 시원한 바람 따뜻한 햇빛 누룩 한 나무 냄새도 다리 아프게 걸어왔기 때문에 보상이 됩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8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평생 일만 하시다 살아오셨고 저희 집에 머물러 제가 어린 시절 저를 보살펴 주셨지요. 제가 어느 정도 커서 학교를 다닐 때는 할아버지는 버스정류장까지 저를 배웅해주셨습니다. 그때 부끄러워서 항상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꾸역꾸역 할아버지는 나와서 작아지는 버스 뒷모습을 바라보셨습니다. 이제 가족들이랑 살던 집을 나와 도시로 올라온 저는 할아버지를 잊고 살았습니다. 제 부모님들은 여전히 회사에 다니시고 온종일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에게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었지만 정말 '안부'말고는 할 이야기가 없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놀라게 해 주기 위해 휴가를 내서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몰래 들어가 놀라게 해 줄 생각에 심장이 뛰어서 호흡이 불안해지더군요.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집에 할아버지가 계신지 몰래 담 너머로 찾아봤습니다. 항상 앉아 계시던 마루에 없으셔서 방에 계신가 하고 더 높이 담 위로 팔을 걸쳐 상체를 들어 올렸습니다. 마당 안 쪽 쭈그려 앉은 할아버지의 뒷모습 할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얇은 나뭇가지가 콕콕 바닥을 찔렀고 그 아래에 개미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나는 이름 모를 기분에 무슨 잘 못된 일이라도 본 것 마냥 담 밑으로 숨어 놀랜 가슴을 삼켰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봤을 때 여전히 할아버지는 개미를 압사시키고 있었습니다. 집 반대편으로 뛰어 근처에 있는 책방에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읽기 좋을 책을 고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문 근처에서 크게 기침을 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는 나무문을 여니 할아버지가 살짝 구부러진 허리를 세운채 저를 보며 웃으셨습니다. 발 밑에는 검은 때가 널브러져 있어 자꾸 눈이 갔지만 웃음으로 가린 눈을 얼른 할아버지를 안으며 확실히 숨겼습니다. 할아버지와 마루에 앉아 때로는 크게 때로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다가 부모님과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오기 전 할아버지에게 책을 쥐어드리며 심심하실 때 읽으시라고 재밌는 책 골라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책은 보시지도 않은 채 제가 이뻐서인지 연신 등을 쓰다듬어 주시고 손에 꼭 쥔 채로 함께 논길을 걷다 인사드리고 헤어졌습니다.
몇 년 후 다시 찾아뵀을 때는 치매에 걸리셨더군요. 다행히 동네 양반이라 소문이 나신 분이라 치매에 걸리셨을 때도 점잖으셨습니다. 더 이상 개미를 괴롭히지 않는 할아버지는 날아다니는 잠자리만 보셔도 웃으시며 박수를 치셨습니다. 자주 찾아뵈며 함께 참 많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갔던 계곡도 가고 철도 다리 밑에 냇가도 가서 다슬기도 잡았습니다. 고목 같이 갈라진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내면 뽀얀 살을 가진 아이가 있을 것 같아 눈물이 자꾸 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할아버지는 우리를 떠나셨습니다. 검은 정장을 입고 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제게 아버지가 책 한 권을 주셨습니다. 책 면은 깔끔히 녹슬었지만 코부분이 접히고 접혀 갈라진 채 햐안 실밥을 보이며 힘겹게 벌어지는 책을. 아버지의 손에서 제 손으로 건네질 때 할아버지가 기억이 났고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 뒤에서 아버지는 네가 준 이 책을 혼자 계실 때 매일 같이 펴 보시며 읽으셨다고 했습니다. 제 눈물은 할아버지가 그리워서 흘리지 않았습니다. 혼자 건조하게 늘어지는 시간이라는 벽을 지긋히 감당하셨을 할아버지가 딱해서 그게 슬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