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quip Feb 03. 2023

나의 분실물 보관섬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사람에게 지갑이란 돈과 카드를 편리하게 보관해 주는 물건이 아니라, 모인 귀중품을 한 번에 잃어버릴 수 있게 해주는 계란 바구니다. 그간 잃어버린 지갑이 몇 개나 되는지 기억조차 잃어버렸다. 지갑만 아니라 아주 어렸을 때, 밤에 꾸역꾸역 해 놓은 숙제나 준비물들을 몇 번이고 잊고, 잃어버렸다. 깜빡깜빡 잊는 일이나, 툭 하고 잃어버리는 일은 살면서 지각만큼 꾸준히 쉬지 않고 해온 삶의 의무였다. 잊는 일과 잃는 일은 닭과 달걀, 원의 시작점, 생성과 소멸처럼 우로보로스 차원의 일이다. 잊어버려서 잃어버리고, 잃어버려서 잊어버리는 건 둘 다 지나고 나면 똑같다. 이렇게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영원한 순환의 순리처럼 내 소유물들도, 기억도, 시간도, 마음도, 나의 어떤 삶도 잃고 잊어버렸다. 나의 사라진 것들을 한 데 모으면 아마 여러 지갑들과, 옷들, 잡다한 물건들과, 얼굴도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멀뚱멀뚱 자리를 모른 채 서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가끔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 어떤 섬이 있어, 그곳에 내가 잊고 잃은 것들이 마치 저 세상에 모인 영혼들처럼 내가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곳의 사람들은 새로 이름을 짓고, 얼굴을 만들어서 서로를 불렀으면 좋겠다. 지갑과 시계를 귀중히 여기고 다른 많은 물건들이 각자 자리를 잡아 넉넉히 머무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다소 중요한 서류들을 대신 제출해 주면 좋겠다. 기왕이면 내게 다시 돌려줘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잃어버린 책들을 읽고 그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내가 좋아하던 꿈을 대신 이뤄도 괜찮을 것 같다. 막상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고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거기선 사라진 마음들이 그곳에서 정성스럽게 표현됐으면 좋겠다. 그 마음들은 이제 내게 인사할 일 없겠지만, 언젠가의 시간들에서 없는 기억들을 충분히 누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떤 섬이 썰물도 없이* 나 대신 그것들을 쉴 수 있게 해 주면 좋겠다. 그러다 어느 날 이곳의 삶을 거기로 보내게 되면, 나는 먼저 간 것들의 가장 뒤에 오는 배에 실려 가서 인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오랫동안 지내며 친해진 기억과 마음들에게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함께 잊어버렸던 노래를 들으며 아주 오래전 잃어버린 쉼 에게 안길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겐 아직 사라진 것들도 보이지 않고, 사라질 것들만 손에 쥐고 있다. 지금은 내가 이 모든 삶의 섬이다. 나 사는 이 섬엔 썰물*도 있고, 밀물도 있지만 빠져나가는 파도에 쉽게 많은 것들을 흘려보낼 수는 없다. 아직은 이곳에 남기로 한 절망과 슬픔과 불안이 이 좁은 땅을 잔뜩 삼켜도, 이 땅을 지키는 일도 남은 것이다. 나는 이유도 없이 이 섬에 왔*지만, 그래서 이 섬을 놓고 갈 수도 없다. 온전히 끝에 닿기 전엔 서있는 곳이 끝이다. 이 밤은 오늘의 끝이지만 내일의 알이다. 섬의 아침 세계는 이 밤을 깨고 태어난다. 희망은 오늘만큼 내일 패배하고, 기쁨은 하루가 가기 전에 자기 색을 다 잃겠지만, 나는 산산이 깨진 것들을 주워 오늘을 같이 보내고 다시 내일의 해변에서 떠밀려온 것들을 주울 것이다. 수평선 너머에 선처럼 가만히 누운* 해를 맞으며.



*너 사는 섬엔 아직 썰물이 없어.(검정치마 - 섬)
*이유도 없이 나는 곧장 섬으로 가네(도마 - 이유도 없이 나는 섬으로 가네)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 요조

작가의 이전글 상상과 후회의 멀티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