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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은 Sep 15. 2022

누추한 내게

이름이 없는 나를 부를 땐,


세속의 존재. 대단하고 멋있는, 그럴듯한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 세속을 벗어난 이름 없는 존재 자체의 초라함에 대한 이야기. 그런 모호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세상과의 광활한 대비를 몸소 누리며 행복해하는 작고 여린, 한낱으로 여겨지는 존재.


초월의 계절.

초월한 날씨.

초월 안에서의 평범한


사람.


그날은 바람이 은은하게 불었다. 늦여름에 우거진 나뭇잎이 물결치듯 은은하게. 날씨가, 불어오는 바람이 이상하리만치 귀하게 다가왔다. 바람이 스치고 보드라운 햇살이 잠시 머물기엔 내가 마땅하지 않게 누추하다 생각이 들었다. 보란 듯이 진열된 유리관 속의 반짝이는 것과는 다른 귀함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이 그랬고 손을 뻗으면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달랐다. 스치면 사라지고 마는 영원성이 달랐다. 또 언제나 같지 않은 희소성이 달랐다. 가질 수 없는 귀한 아름다움에 대해 위축되지 않는 것이 달랐다. 나는 여지없이 작아졌고 한낱의 존재가 되었지만 비참하지 않았다. 허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보잘것없음을 받아들이고 위대한 아름다움을 우러러보는 것이 행복했다. 마치 어릴 적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우러러보는 듯이. ‘나’라는 존재를 깨우쳐 가는 아이처럼, 꾸미고 갖추고 힘주지 않아도 되는 풀어진 존재가 되었다. 나는 날씨 아래에서 마음껏 작아질 수 있었고 초라하고 누추한 내가 될 수 있었다. 귀한 것, 눈부신 것, 감히 견줄 수 없는 대단한 것에 내가 있었다. 머리 위로 푸름이 늘어트려진 채 흔들렸다. 다정한 그늘 사이로 햇살이 떨어졌다. 내게서 별이 부서지는 듯이 반짝거린다. 바람이 나를 매만지고 나는 더욱 무방비한 채로 무의미 해졌다.


초월의 계절,

초월한 날씨.


우주에서 나를 찾아내듯이 미세한 질량의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빈 봉투에 공기로 채워지듯이 행복이 채워졌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으로 부풀려지고 있었다. 황홀했다. 아무것도 없는 내가, 나 자체로 채워진다는 것이 황홀하게 행복했다. 지나가고 스치고 저물어갈 행복이지만 왠지 충분하다는 만족감이 있었다.

욕심 없이 세상에 놓인 누추한 나를, 간사한 감정의 개입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로 마주했다. 보란 듯이 나를 만나러 오는 계절, 거대한 날씨, 귀하나 어렵지 않은 행복이 매일 기다리고 있었다. 걷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떠나는 것은 행복의 시야를 넓히는 일. 나는 그대로였다. 가진 것 없는 누추한 나는 하늘 위로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로 부풀려져 세상을 유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낱의 존재로.

-


'삶은 벌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의문이 아닌 확신에 찬 생각을 하곤 했다. 죄 몫에 대해 생각할 만큼 집요하지는 않지만, 삶이 벌이 아니라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대상 없는 논쟁을 하기도 한다. 평생 나,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행복을 찾고 쟁취하는 존재는 몇이나 될까. 삶의 끝에 다다를 때쯤 늦은 후회를 한다. 그리고 망각을 하고 다시 삶을 부여받았다면 그것은 벌일까. 상일까. 그저 무의미한 세상의 이치일까.

출근을 하고 재미없는 일을 반복하다 점심시간이 된다. 간간히 즐거움은 있지만 행복은 없다. 밥을 먹고 10분 남짓 남은 시간 동안 혼자 회사 근처를 걸었다. 아무도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어떤 감정도 없이. 길을 걷는다. 살아가기 위한 시간이 아닌 곳에 발을 디뎠다. 바람이 불었다. 오후의 따가운 햇볕이 피부에 닿는다. 나무가 수런거린다. 나는 걷다가 그늘 좋은 자리에 앉아 마저 누렸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 별거 없는 행복이 뭘까. 이토록 쉽게 행복해지고 마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멀리 있지 않아서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 '나중에', '언젠가'하고 미루어지는 것이 사실은 행복이었다. 언제나 내일이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 안에서.

삶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막연하게 살아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 가끔은 그 부질없는 문장이 오늘을 되돌아보게 했다. 살아가는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똑같은 궤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 삶이었다. 삶의 시간엔 운이 따라야 한다고 했다. 갖춰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삶에서 날씨와 상관없이 껴 입는 치레. 화려할수록 깊이 새겨지는 궤적은 업적이 된다. 단 한순간도 빈수레를 끌었던 적이 없다고 해도 궤적은 공평하지 않았다. 운의 무게는 환희와 허무를 동시에 터트린다. 따라가야 하고 나아가야 하기에 뒤를 돌아볼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삶의 끝에서도 궤적이 유의미할까. 따라가기 위해 수레를 끌던 자신의 모습은 행복했었을까. 살아가는 시간 안에는 나를 찾을 수 없다. 길을 잃어야 한다. 길을 잃어야 길을 찾아 나선다. 그제야 물을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질문이 있어야 답이 있는 것처럼 물음 끝에 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주 가끔, 이름이 없는 내가 불쑥 정체성을 드러낼 때가 있다. 짧은 순간 행복을 머금고 사라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냥 '나'. 누추한 나. 초라한 나. 걸친 육체와 갖춘 이름과 검은 잉크로 각인되지 않은 태초의 내가 행복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아름답지도 못생기지도 않았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피부가 좋은지 눈이 큰지, 눈동자가 깊은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불릴 수 없는 존재로 걱정도, 생각도, 감정도 없이 순수하게 날씨만을 누렸다. 무게감 없는 순간의 내가 사무치게 좋았다. 이름이 불리면 그 이름에 맞는 삶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그러나 나는 책임도, 욕심도, 양보도, 이해도 없는 맑은 시선으로 내가 바라는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내일이 없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름이 아닌 나를 불러 본다. 날씨 아래에서, 세상 안에서, 바람이 감싸는 안온한 자리에 앉아 초라한 나를 찾았다. 궤적이 남지 않는 길. 그래서 수레를 포기하고 겹겹이 에워싼 치레를 벗고 단 한 번뿐인 오늘의 나를 채웠다. 그리고 물었다. '행복해?' 행복하냐고, 날씨가 변하는 순간마다 물었다. 거리낌 없이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있었다. 내가 나를 마주하고 단 십 분의 행복을 만끽했다. 어쩐지 내 삶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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