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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송 Mar 01. 2023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오늘따라 곱씹고 싶은,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요즈음 내가 있는 캘리포니아 땅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린다. 온화한 기후답지 않게 연일 창밖을 두드리는 밤비를 들으며, 어느덧 다가온 3월 1일의 새벽.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를 다시 한번 곱씹어본다.


올해 내린 큰 결정 이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고민이자 참회를 담아 부족하지만 오마주를 해본다.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1942년 6월 3일

윤동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美의 부재 속 남의 나라 美國,


마땅히 부릴 줄 아는 재주가 없어

한 줄 글이나 따라 적어 본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걱정을 양분 삼아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러

아침 강의를 하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조국을 떠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나는 만 이십구 년 십 개월을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글로만 투정할 수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다가올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어느덧 아침은 왔건만,

왜 어둠은 여전히 내 등불을 잠식하는가.


나는 나에게 작은 술잔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2023년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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