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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말을 약속으로 여기지

너에게 배운 것 5

by 아라

"엄마, 나 아무래도 교회에 가야 할 것 같아."

"응?"


네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아.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좀 더 네 말을 이해하고 싶어 너에게 물었지.

"왜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그때 너는 꼬깃꼬깃 접힌 전단지를 주머니에서 꺼냈어.

"오늘, 학교 끝나고 나올 때 교문 앞에서 이걸 받았어. 이거 나눠 주고 교회에 오라고 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네" 하면서 이걸 받았어."


"엄마, 약속했으니까 가야 되겠지?"

"정말 교회에 가고 싶은 건 맞아?"

"아니. 그건 아니야. 근데 약속 했으니까 지켜야 될 거 같아서..."


엄마는 너에게 교회에 가고 싶은 게 맞는지 물어 보았지. 너는 그건 아니고 약속을 했으니까 지켜야 할 것 같다고 답했어. 엄마는 보통 이런 전단지를 나눠 줄 때 오라고 초대하려고 나눠 주는 건 맞다, 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기 때문에 누구에게 주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한다,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 어른들이 약속을 받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받은 사람들이 모두 올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걸 받은 사람 중에 정말 교회에 갈 마음이 있는 사람이 올 것을 기대한다고 장.황.하.게. 얘기했어.


그런데 아이야.

지금이라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 번 교회에 가 뵈도 되겠다, 라고 했을 것 같다. 굳이 장황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말릴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이야. 그치?


엄마가 그 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게 장황하게 늘어 놓았던 긴 말들은 아니었어. 마지막에 짧게 덧붙인 말이 엄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어.


말을 약속으로 여기는 네 마음이 너무 소중하다는 거.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은 참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거.

그래서 네가 참 믿음직하다는 거.


우리가 함께 읽은 책에는 이렇게 써 있었어.


약속이란,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 주신다고 손가락 걸고 말한 것을 정말 사 주신 것.

약속이란,

두 시에 친구와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했으면 두 시까지 놀이터에 꼭 가는 것.

약속이란,

우리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게 해 주는 것.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여러분, 약속을 잘 지키세요. 그래야 믿음직한 사람이 됩니다." (주1)


아이야.

엄마가 오래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했던 약속이 생각난다.

그 때가 봄이었나 봐. 담임 선생님과 반 친구들은 5년 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모이기로 했어. 5년 뒤의 약속이라니. 꼭 나와야 하는 약속인데, 엄마는 기억력이 안 좋고 잘 잊어버리니까 해마다 새로 사는 다이어리 맨 앞장에 적어 놓았지. "OO년 OO월 OO일, OO여고 앞 OO"


5년이 지나고 엄마는 그 날, 그 시간에, 그자리에 나갔어.

선생님도 잊지 않고 그 자리에 나오셨어.

그런데 모든 친구들이 온 것은 아니었어. 60명이 함께 나눈 이야기였는데, 엄마를 포함해 10여 명의 친구들만이 그 자리에 나왔어. 어느 새 성인이 된 우리는,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했어. 그러니까, 선생님과 함께 술집에 들어가 잔을 부딪치며 맥주도 함께 마셨다는 뜻이야. ^^


그 날의 기억이 난다. 먼 미래의 약속을 지키려면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성실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아.


때로는 엄마가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너에게 원망을 들은 적도 있어. 그런 순간마다 엄마가 손쉽게 내뱉은 말들 중 네가 기억하고 있는 말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 네 덕분에 엄마도 점점 너와 섣부르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지는 않게 되었어. 네 덕분에 말로 뱉은 것은 약속했다 여기고 지키려고 노력해온 것 같아. 그 뿐만 아니라 엄마도 너와의 약속은 지키기 위해 기억하게 되고 노력하게 되더라고. 현재를 모면하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또는 지킬 의지도 없는 미래의 약속을 하는 일은 없어지더라고.


어릴 때나 지금이나 너는 허투루 약속을 하지 않아. 엄마, 아빠가 나들이나 여행, 또는 특별한 외출 계획을 세우면 자주 너에게 물어보잖아. '같이 갈래?'

그런데 그 때마다 넌 즉흥적으로 가겠다, 가지 않겠다 답변하지 않더라고. '한 번 생각해 볼게.' 늘 먼저 한 번 생각해 본다고 하고 나서, 네 일정과 네 계획, 그리고 네 마음과 의지를 살피는 것 같더라. 엄마로서는 즉각적인 답을 듣지 못하는 것이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너의 약속, 너의 말은 덕분에 늘 예측가능하고 믿음직했어. 섣부른 약속을 쉽게 하고 깨 버리는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아이야.

너는 엄마에게 '말이 곧 약속'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단다. 엄마에게 약속이 무엇인지, 그리고 말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해 주어서 고맙다.




아이야.

너는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하면 또 한 번 '약속'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엄마 생각에 너는 지금 너 자신과의 약속을 수행 중이지.

네가 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보내는 1년을 생각하며, 엄마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생각했어.


네가 곁에 없는 시간,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그리고 너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엄마의 시간을 꽉 채워 보내고 싶단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리하여 네가 스스로를 도울 때 그래서 온 우주가 너를 도울 때, 엄마도 그 우주의 작은 일부이기를 바랐어. 또 엄마도 엄마 스스로를 도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네가 스무 살이 된 올해의 첫 날, 엄마는 엄마 자신과 한 가지 약속을 했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글을 쓰기로. 다른 사람들과 약속한 것이 아니고, 엄마도 엄마 자신과 약속한 거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그런데 약속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 그게 너무 어렵더라고. 처음 며칠은 바짝 긴장 상태인지 알람 소리가 잘 들리고 벌떡 일어나지더라. 그런데 일요일은 하루 쉬었거든. 그랬더니 월요일마다 완전히 새롭게 시작해야 하더라고. 1월이 지나고서는 일요일에도 일어나게 되었어. 그렇게 매일 다이어리에 동그라미를 쳐 가면서 매일 매일 약속을 지키는 연습을 하게 되었어.


그런데 어느 새 지금 9개월이 되어 간다. 초기 100일 동안은 지키지 못한 날도 간간이 있었는데 100일이 지나고 나니까 조금씩 아무 생각 없이 자도 알람 소리에 눈이 떠지더라고. 그리고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지키게 되더라.


출장을 가는 일이 잦으니까 e-북을 몇 권 구입해 핸드폰에 넣어 놓게 되었어. 책을 깜박 잊어 책을 읽지 못하는 일은 없어졌어. 엄마가 공부하겠다고 옆 자리 동료 잠 못 자게 새벽부터 불을 환히 켤 수는 없으니까 핸드폰용 이어폰까지 구비해 갖고 다니게 되었어. 그러면 노트북을 켜기 어려운 날, 유용하더라고. 출장 중이더라도 책도 읽을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고 독서모임 접속도 할 수 있더라고. 새벽부터 일정이 있는 날은 이동 중에라도 접속하게 되더라고. "못 지키는 상황이 되었네."가 아니라, "그럼에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이 바뀌고 나니까, 어떻게든 방법은 생기더라고. 100% 지키지 못할 바에는 깨버리자, 하면 0%가 되는데, 100% 지키지 못하더라도 가능한 만큼 해 보자, 했더니 대부분은 80-90% 지킬 수가 있더라고. 그게 약속의 힘인가 싶어.


아이야. 니체는 이런 말을 했어.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 —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역설적 과제가 아니겠는가?”(주2)


이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본다.

약속할 수 있는 동물. 인간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힘이 바로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겠다. 단순히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말하고 그것을 지켜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과제라는 뜻이겠다.


니체는 왜 역설적이라고 말했을까? 엄마 생각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래의 자신을 믿고, 또 타인에게 자신을 믿게 만들기 위해 약속을 한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네가 어릴 적 “말 했으니까 약속이고, 약속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 그것은, 인류가 오래 걸려 배운 아주 특별한 힘을 네 안에서 보여 준 것이었어. 약속을 지키려는 그 태도 속에서 너는 이미 인간다움의 본질을 살아내고 있었던 거야.




늘 엄마의 스승이었던 아이야.

네가 초등학교 때 했던 말인데, 엄마는 그 말을 붙들고 지키는 것이 아직도 쉽지만은 않구나.

네가 그리 단순하게, 말한 것은 약속이라 여겼던 것, 약속하면 지켜야 한다고 여겼던 것.

엄마도 너와의 대화 이후 그리 단순한 진리를 지키며 살려고 노력할 수 있었어. 지금도 노력 중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 지키며 살아볼 거야.


아이야. 너도 엄마도, 그리 살아서

타인에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 보자.

네가 옆에 있다는 것이 늘 엄마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니 늘 고맙다, 아이야.



주1> 채인선 글, 김은정 그림, 《아름다운 가치사전》, 2005, 한울림어린이.

주2>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2002, 책세상.

표지 이미지> Image by Luisella Planeta LOVE PEACE ��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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