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와 말하기 사이

회의록 쓰면서 배운 것들

by 정아라

지금의 일터에 오기 전까지 나는 늘 말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고 그것을 목청껏 소리 높혀 외치려고 애썼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을 넘겨 받고 함께 일한 분들이 무척 좋은 분들이었다. 그 분들과의 첫 만남에서 환대와 경청 같은 단어들을 듣게 되었다. 그것을 잘할 수 있도록 평화 교육으로 안내해 주셨다. 첫 업무에서 환대와 경청을 키워드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교육 한 번이 말하는 사람을 듣는 사람으로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ㅎㅎ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런 나에게 듣는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선물처럼 주어졌다는 것.

그 일은 바로 각종 회의 지원을 통해 많은 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게 된 일이다.


지금은 회의록도 나보다 AI가 더 빠르고 더 잘 하는 시대이다. 이제는 회의록 작성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 AI가 자동으로 해 준다. 그것을 활용하여 또 다른 문서들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AI가 나보다 낫다. ㅎㅎㅎ


그런데 AI가 없는 시대에 회의록을 작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나에게는 정말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회의록을 작성하면서 듣는 연습을 정말 많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잡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잡무가 맞을지도 모른다. 일의 성격상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이 아니다. 업무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류의 그런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소중한 일이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회의록을 작성하면서 많은 것을 연습하게 되었다.


첫째, 저절로 초집중해 듣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듣지 않고 회의록을 쓸 수는 없다. 열심히 듣지 않을 수가 없다. ㅎㅎㅎ 듣는 연습을 진짜로 많이 하게 되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줌 회의가 많았다. 안건지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화면 공유한 상태에서 모두가 보고 있는 가운데 회의록을 작성하다 보면 듣고 있는지 아닌지 등등 나의 상태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는 셈이다. 열심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최고 강도의 요약 연습을 하게 되었다.

발언자들의 의견을 적다 보면 다양한 발언자들이 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요약하여 정리된 발언으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군더더기 없이 잘 듣고 받아적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 안드로메다까지 다녀오시는 분들도 있다. 적다 보면 전혀 다른 얘기를 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강도의 훈련을 시켜 준 또 다른 의미로 더 고마운 분들이다. ㅎㅎㅎ


회의록을 작성하면서 마음과 태도도 달라졌다.


첫째, 발언자의 의견이나 이야기를 그가 말하는 끝 지점까지 따라가 보게 되었다.

안드로메다로 다녀오시는 분들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나도 함께 안드로메다로 다녀오게 되었다. ㅎㅎㅎ 과정을 따라 가야 결과까지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전적으로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앞의 얘기는 쓸데 없는 얘기니까 안 듣고 있다가 마지막 말만 적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의견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계속 따라가다가 결과에 이르러 보는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이든 아니든.


둘째, 무엇보다도 내 판단을 빼고 타인의 마음이나 의견을 왜곡 없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적지 않고 들을 때에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고 정말 좋은 의견이라고 감탄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회의를 기록할 때는 내 판단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게 회의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기록을 하다가 나의 판단으로 필터링하는 습관이 조금은 개선되었다. '저 분의 말씀이 이런 내용이 맞나?' 하는 많이 생각을 계속 하게 되었다. 발언자의 마음이나 의견을 왜곡 없이 기록하고 있는지를 계속 돌아보게 되었다.




집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나 회의를 할 일이 많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돌아보면 다른 분들이 이야기할 때 듣고 있기 보다는 그 다음에 내가 할 말을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 듣고 있니?"

"나, 판단 없이 듣고 있니?"


회의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나의 마음은 같다.

나의 평가와 판단은 내려 놓고 듣고자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충고나 조언이 아니다.


그의 답은 그가 스스로 찾는 것이지 내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며 찾아줄 수도 없다.

설령 찾는다 하더라도 그에게 맞지 않으면 소용 없다.

그러니 마음 속으로 나의 감정과 이성을 향해 외친다.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금지!


자주 실패하지만, 목표는 높다. ㅎㅎㅎ

단순히 말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충조평판 하지 않고 듣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주로 상상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전지에 내 모습의 윤곽을 그려 놓은 것을 상상한다.

내 마음 속과 내 머릿 속은 비어 있다.


윤곽만 있고 속은 비어 있는 내 모양을 상상하고,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 이야기든, 의견이든,)

눈송이가 차곡차곡 땅이 쌓이듯이

내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비어 있는 나의 모습 상상하기.

상대방에게서 나온 무엇인가가

나에게 들어와 쌓이는 모습을 상상하기.


나를 비우고 듣는 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듣는 일.


나에게는 세상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평생 에너지와 수고를 들여야 하는 일 중 하나이다.

오늘도 연습을 이어가 본다.



"진정한 경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다. 상대방이 충분히 말을 마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존재의 현존'이 필요하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침묵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수용할 때 비로소 상대방은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스스로 치유할 힘을 얻기 때문이다." (주1)



"경청은 매우 능동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단순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다른 사람을 위한 빈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그를 내 방식대로 바꾸려 할 때, 그 공간은 이미 나의 생각과 욕심으로 가득 차버린다.

비판 없는 경청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환대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고통이나 기쁨을 정의 내리지 않고 그저 곁에 머물러 줄 때, 상대는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이것은 인간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다." (주2)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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