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주량을 측정하는 방법

관찰

by 정아라

아이야.


네가 대학에 입학해 어느 날 개강파티를 했다고 하더니 집에 와서 이야기를 했어.


"엄마, 아빠, 나 소주 여섯 잔까지 마셨어."

"우와! 술을 아주 잘 마시네! 소주 한 병이 일곱 잔 반인데 여섯 잔을 마셨으면!"


우와! 엄마, 아빠는 깜짝 놀랐지. 엄마는 네가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술을 한 번씩 맛보게 했잖아. 쓰다고 맛 없다고 하더니 이런 숨은 재능이 있을 줄이야! ^^ 엄마, 아빠보다는 네가 훨씬 잘 마신다. 인정!


그리고 나서 너는 '나에게 보내는 카톡방'을 보여 주었어.

"엄마, 내가 술을 마셔본 적이 별로 없어서 내 주량을 모르잖아. 알아야 조절을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마실 때마다 열심히 적었어."


"술 마시기 전에 밥도 든든하게 먹었고 술 한 잔 마시면 물도 한 잔 같이 마셨어. 마신 술 도수도 다 적었어. 종류가 다 달라서. 그냥 소주였으면 못 마셨을 것 같은데 이거는 과일향이 나는 거라서 괜찮던데?"


엄마, 아빠는 네가 보여준 '내 카톡방'을 보고 빵 터졌지. 기록한 시간이 있으니 몇 시 몇 분에 몇 도의 술을 한 잔씩 마셨는지 다 알겠더라고. 마신 술잔 수와 도수를 적으면서 술을 마셨다니! ㅎㅎㅎㅎㅎ


"9시쯤인가? 나와서 친구 차 타는데 데려다 주고 들어왔거든. 근데 엄마, 앉아 있을 땐 괜찮았는데 일어나서 걸으니까 머리도 띵하고 어질한 느낌이 들어서 이게 취한 건가 보다, 했어.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고."


너는 술의 양과 그에 따른 너의 상태를 잘 관찰했더라.


네 얘기를 들으며 엄마는 엄마의 20대 초반 처음 술을 마셨을 때가 떠올랐어.

너처럼 엄마를 관찰하지도 못했고 어느 정도 마시면 취하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 무식하게 마시고 가끔 실수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 큰 실수를 두 번 했던 기억이 나.


한 번은 대학교 2학년 때.

그 날은 1학년들을 데리고 술자리를 한 날이었어. 후배들이 참 사랑스럽고 좋더라고. 기분이 좋았던 엄마는 그 날 원서를 사야 할 책값을 받아 지갑에 들고 나왔는데, 술기운에 너무나 들뜬 나머지, 엄마도 모르게 "나 돈 많아! 오늘은 내가 살께!" 한 거야. 20만원에 가까운 술값을 호기롭게 계산하고 계산했다는 사실조차 기억을 못 했지. 다음 날 학교 와서 들으니 엄마가 취해서 그런다는 걸 알아차린 친구들이 돈의 절반쯤을 남겨 엄마 주머니에 다시 넣어 주었다는데, 술 취해 집에 가면서 그마저도 다 잃어버리고 난 뒤였어.

엄마는 그 학기에 전공 원서책을 사지 못했어. 그리고 도서관에서 또는 친구들에게 빌려 한 학기 내내 책을 복사해 공부했어. 큽. 책도 없이 공부를 잘 했겠니? 성적도 동반 하락 ㅋㅋ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길께.


또 한 번은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던 20대 중반쯤.

노동조합의 활동가 형님(?)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였는데, 그 날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술을 받아 마시고 앉아 있다가 그 자리에서 거의 기절. ㅎㅎㅎ 그렇게 갑자기 블랙 아웃이 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내내 자고 있다가 술자리가 파할 때쯤 일어나 겨우 집에 왔는데. 어후.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모든 기억이 끊겨 버릴 수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조심해야 한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


이후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너를 낳고난 뒤에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신 적이 한 번도 없어. 너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가 그러면 안 된다고 여겼어. 그런 정신 상태로는 너를 보호하거나 지킬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생각도 많이 바뀌었지. 엄마가 술에 너무 관대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 음주 운전, 음주 폭행 등 음주 후 벌어지는 여러 범죄적 행위들에 대해 그렇게 관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어.


여성학과에서 공부하면서 남편들이 아내를 폭행한 사건들과 폭력적인 남편에 대항했던 여성들의 폭행 기록에 대한 재판 기록들을 보게 되었어.

남편들의 재판 기록에는 종종 "술에 취해 심신 미약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었어. 술은 남편들의 폭행이나 아내 살해 사건에서 양형을 경감시켜 주는 요인이었지.

반면 아내들의 재판 기록에는 "자주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등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고" 라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더라고. 여성들의 음주는 평소 아내와 엄마로서 올바른 행실을 하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요소가 되고 있었어.

그 재판에 관여한 검사, 판사들의 다수는 남성들이었을 거야. 법보다도 먼저 작동하는 것이 그 시대의 문화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이야기가 너무 많이 흘러왔네. ㅎㅎ


아이야.

엄마는 네가 주량을 측정한 이야기를 듣고 엄마는 스무 살 때는 너무 철없이 날뛰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너처럼 엄마 자신을 관찰하지 못했다는 것도 새삼 알게 됐어.


그래서 너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


네가 술을 얼마나 마실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네가 돈을 소비하는 패턴은 어떤지,

네가 언제 일어나고 잠자리에 드는지,

너의 생활 관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네가 선택한 공부는 너에게 즐거움을 주는지,

또 너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네가 무엇을 할 때 즐겁고 기쁜지,

새로운 경험이 다가오면 어떨 때 기꺼이 다가가고 싶은지,

외부애서 오는 사람과 상황에 너의 감정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다 보면 주량 말고도 너를 관찰해야 할 것이 많겠지?


너 자신을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바라보면서

네가 너 자신에게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너를 알아가는 너의 새로운 시간들이 엄마에게도 너무나 기대가 된다!


너의 주량을 알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며 관찰한 너에게 건배! ㅎㅎㅎㅎㅎ


인생은 꼭 언어를 통해서만 말하지 않는다.

행동과 반응, 직관과 본능, 감정과 몸의 상태를 통해서

어쩌면 말보다도 더욱 심오한 표현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략)

만약 우리가 자기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반응을 읽어낼 수만 있다면

더욱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주1)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결코 나 자신을 완전히 맡겨버리지 않습니다.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것들에 관찰자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내가 온 존재를 바쳐 몰두하는 단 한 가지 일은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는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보는 일’에 더 온전히 몰입합니다. (주2)



주1> 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주2> 헨리 데이빗 소로우,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표지 이미지> Image by sgroene from Pixabay.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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