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지키는 너에게

by 정아라

아이야.

네가 특별한 1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잖아.

엄마와 아빠는 그 동안 집이 텅빈 것 같았는데, 네가 집으로 돌아오니 집이 꽉 찬 것 같았어. 설레는 마음과 행복감이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어. 너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도 새삼 느꼈지. 너는 사실 대부분의 시간에 네 방에 있는데 ㅎㅎㅎ 엄마, 아빠와 하루 종일 대화를 하거나 하루 종일 같이 노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우리가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아이.

엄마, 아빠 삶에 큰 의미를 선물해 주는 너.

존재만으로도 너무나 소중한 너.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여행도 다녀왔고,

너와의 시간을 만끽하며 많은 대화들을 나누었지.


처음으로 주어진 여유로운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 보았고,

너는 아르바이트도 해 보고 싶고 운전 면허도 따고 싶고 친구들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도 가지고 싶다고,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했지.


그런데 네가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치고 나서도 네가 그냥 집에만 있는 거야.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앞으로 많지 않을 텐데, 이 시간을 네가 그저 흘려 보내는 것은 아닌지 아쉽다는 마음도 들었어. 그래서 사실 잔소리도 했지. 아무 것도 안 하면 아무 결과도 안 생긴다며. 뭐라도 하라고 말이지. ㅎㅎㅎ


그런데 말이야. 어느 날 엄마가 늦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네가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 그 모습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어.

"아 맞다!"


네가 집을 비웠을 때 엄마, 아빠가 가장 어려웠던 일 중 하나가 뭔지 아니? 고양이 밥을 챙겨 주는 것이었어. 엄마, 아빠는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너는 고양이 밥을 내내 챙겼잖아. 자그마치 9년 동안이나 너는 고양이의 아침, 저녁 식사를 책임졌지. 그런데 네가 집을 비우고 나서 엄마, 아빠는 집안일 분담을 새롭게 해야 했어. 그래서 일찍 출근하는 엄마는 고양이 저녁 식사를, 늦게 출근하는 아빠는 고양이 아침 식사를 맡았지.


그런데, 그게 너무 어려운 거야. 엄마, 아빠가 맡고 있는 고양이 화장실 청소는 깜박 잊는다 해도 아침에 못 하면 저녁에 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인데 '밥'은 그게 안 되잖아. 밥을 챙긴다는 건 시간을 맞춰서 준다는 뜻이잖아. '시간성'이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 그래야 아이들이 배가 고프지 않으니까.


그런데, 고백하자면, 엄마는 느닷없이 퇴근이 늦어지는 어떤 날들에, 고양이를 까맣게 잊고는 늦게 들어왔어. 집에 오니 아이들이 난리가 난 거야. 어떻게든 밥을 꺼내 먹으려고 사료통이 거실에 굴러 다니고 엄마가 오니까 빨리 밥 달라며 엄청 따라다니며 재촉을 하는 거야. 엄마 귀에는 야옹 야옹이 '엄마 밥 주세요', '엄마 빨리 밥 주세요' '우리 배고파요' 하는 걸로 들렸지.


세상에.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는 얼른 밥부터 줬지. "얘들아, 미안해." 하면서...


세상에 세상에.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한들 자기 아이 밥을 굶기면서 나랏일 한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니? 세상에 그 어떤 일이 자기 아이들 밥 굶겨도 괜찮을 만큼 중요한 일일까. 일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정작 우리집 가장 작은 생명체들을 까맣게 잊은 엄마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어. 생명체들의 밥을 굶길 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니. 엄마는 그 날 냥이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했어.


네가 돌아와서 이렇게 편안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

"아, 네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사를 챙기고 있구나."


그제서야 네가 지키고 있는 일상들이 눈에 들어 왔어.


그러고 보니 너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늘 7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나더라. 그리고는 엄마, 아빠의 아침 식탁에 함께 앉아 함께 밥을 먹지. 그 뿐인가. 덩달아 바삐 수저도 놓고 과일도 깎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거들지. 밥을 다 먹고 나면 식탁도 함께 치우고.


그 뿐이 아니네. 종일 집에 있건 외출을 하건 너는 너의 삼시세끼를 성실하고도 정성스럽게 챙겨 먹어. 그리고 나면 또 싹 치워 놓고. 집에 있는 반찬으로 챙겨 먹기도 하고 때로는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기도 하면서 말이야. 그 흔한 배달 음식조차 거의 시켜 먹지 않는 너를 얘기하면 사람들이 다 무척 놀라. 10대부터 스스로 밥 챙겨 먹는 아이는 정말 드물다고 말이야.


너의 매일의 식사뿐만 아니라 너는 고양이들의 식사도 너무나 정성스럽게 챙기고 있네.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 동안에는 고양이들의 밥도 준비하지. 우리 꼬맹이들 식사 챙기는 것도 사실 꽤나 번거롭잖니. 방광염을 앓고 난 아이 덕분에 늘 습식과 건식을 한꺼번에 챙겨야 하니까.


캔이나 파우치에 들어 있는 습식은 한 번 개봉하고 나면 신선하게 보관하려고 냉장고에 보관하다 보니, 먹일 때는 따뜻하게 데우거나 따뜻한 물을 추가해 먹여야 하지. 물을 끓이거나 전자레인지로 데워야 해서 손이 한 번 더 가지.


그뿐인가. 울집 두 녀석은 식습관이 너무 다르잖아. 한 녀석은 후다닥 먹어 치우고 다른 녀석의 식사까지 탐하기에 둘을 잘 분리시켜야 하지. 한 녀석은 입이 짧아서 먹다 남길 때도 많은데 그러면 또 좋아하는 츄르를 살짝 타서 마저 먹여야 하고, 또 한 녀석은 많은 양을 빠르게 먹고 나면 토할 때가 많으니 늘 두 번에 걸쳐서 시간 차를 두고 나누어 먹여야 하지. 참 손이 많이 가. 그치?


그렇게 캔 식사를 먼저 하게 하고 약간의 시간 차를 두어 마지막을 건사료를 주고 식사를 마무리하지. 이 시간이 늘 30분은 걸리니까 말이야.


또 너는 치과에서 이가 약하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 삼시세끼 후 늘 양치를 하고 또 치실까지 꼼꼼하게 하고 있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늘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고,

하루 삼시세끼를 성실하게 스스로 챙겨 먹고,

하루 세 번 치실까지 꼼꼼하게 양치를 하고,

아침 저녁으로 울집 냥이들을 위해 기꺼이 여러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밥을 챙기고,

저녁이면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지금

너의 하루의 시작과 끝은 늘 한결 같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모습이구나.

그렇게 안정된 일상 속이니 잠을 못 자는 일도 많지 없고,

일과의 흐트러짐에서 오는 건강상의 불안도 적고,

일상이 안정되니 너의 마음과 정서도 대체로 그렇게 건강한 것일까 생각해 본다.


엄마는 네가 일정이 있든 없든, 네가 너의 일상을 얼마나 성실하게 지켜 나가는지를 이제야 보게 되었어.

그리고 그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일상들을 지키는 것이 어쩌면 너의 인생을 지켜주는 파수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아이야.

미국의 작가인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가 말했대.

"우리가 하루하루를 보내는 방식이, 곧 우리가 인생을 보내는 방식이다." (How we spend our days is, of course, how we spend our lives.) (주1)


윌러드 듀런트(Will Durant)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요약하며 이렇게 말했어.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탁월함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We are what we repeatedly do. Excellence, then, is not an act, but a habit.)


고대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어.

“지금 바로 살아라. 각각의 하루를 마치 하나의 생애처럼 세어라." (Begin at once to live, and count each separate day as a separate life.)


지금만큼만 네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너의 인생에는 굵직한 나이테가 생길 거야. 그 시간의 흔적들은 분명히 사라지지 않고 새겨질 거야. 그 하루하루가 모여서 너의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갈 거야. 그러면 언젠가는 어떤 모양이 되어가는지 알아볼 수 있겠지?


엄마도 엄마의 하루하루 잘 보내려고 해.

일상을 지키면서 때때로 찾아오는 낯선 이벤트와 사건들도 즐겁게 맞이하면서 말이지.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빨리빨리 안 한다고 잔소리해서 미안해. 쏘리쏘리~~~



주1> 애니 딜라드, 『글쓰기 수업』 (The Writing Life,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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