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네가 요즘 정말 시간이 남아 돌잖아. ㅎㅎㅎㅎㅎ
이렇게 길고 긴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적이 언제 또 있었나 싶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 과정을 어느 정도 마치고 대학 생활을 앞두고 있는 시점.
엄마가 퇴근하고 돌아와 "하루종일 뭐 했어?" 물어 보면,
어떤 날은 친구들과 함께 공포 컨셉 방 탈출에 갈 거라고 '방 탈출기'를 찾아 보았다 하고,
어떤 날은 알바 하려면 필요하다고 보건증 만들러 다녀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운전 면허 시험 보러 다녀 오기도 하고.
그런데 요즘에는 정말 방구석에서 나오지를 않더구나? ㅎㅎㅎ
그러더니 너는 요즘
부엌을 탐험하며 다채로운 요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
두부 그라탕을 만들어 엄마의 저녁 밥상을 차려 주기도 하고,
바나나빵을 구워 한 조각 남겨 맛보라고 해 주기도 하고. ㅎㅎㅎ
네 덕분에 집에 들어올 때면 늘 기대가 돼.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았을까, 하는 것도 궁금하지만,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요리로 엄마의 몸과 마음을 채워 줄까, 하고 말이지.
또 너를 보면서 엄마는 생각해.
이 시간이 네 인생에서 얼마나 귀한 한 시절이 될까, 하고.
어수선한 부엌을 보면,
네가 한창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시간의 증거라는 것을 알게 돼.
심심한 시간은 참 이상하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시간이 그냥 증발해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 안에서
아주 작은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잖아.
눈에 당장 보이지 않을 뿐,
속에서는 무언가가 조용히 자라고 있지.
마치 흙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아래에서 씨앗이
자기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네가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을 때
한편으로는 ‘운동 부족 아니야?’ 살짝 잔소리가 나오려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묘하게 안심이 돼.
누군가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너만의 속도로
시간을 쓰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 거야.
사람은 바쁠 때보다
심심할 때 더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그리고 그 생각들은
대개 쓸데없는 것처럼 시작되지.
‘이 바나나는 검은 점이 생겼네. 지금쯤 맛있겠다. 뭘 만들어 볼까?’
‘냉장고에 두부가 있네. 구울까, 데칠까, 뭘 해 먹을까?’
이런 사소한 물음표들이
어느 순간 요리가 되고, 계획이 되고, 경험이 되지.
생각은 늘 거창하게 시작되지는 않아.
대부분 심심함의 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지.
엄마는 네가 요리를 시작한 것이
배가 고파서이기도 했지만
심심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해.
시간이 남아돌고,
핸드폰 들여다 보다가 목도 아프고,
영상도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때,
그럴 때 사람이 결국
자기 손을 쓰기 시작하게 되는 건 아닐까?
손을 쓰는 순간
시간은 비로소 모양을 갖고 나타나.
썰고,
으깨고,
섞고,
굽고,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더 이상 텅 빈 것이 아니야.
그 시간에는
냄새가 생기고,
색이 생기고,
식감이 생겨.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만들었다’는 감각이 너에게 남게 될 거야.
ㅋㅋㅋ 사실 엄마는 네가 저녁 밥상으로
‘두부 그라탕’을 내놓았을 때
“이게 도대체 뭐지?” 했어. ㅎㅎㅎ
그래서 엄마가 사진 먼저 찍었잖아. ㅎㅎㅎ
비주얼도 처음 보는 비주얼에,
맛도 처음 먹어 보는 맛이었어.
그런데 그릇 위에 고스란히 담긴
너의 시간, 너의 수고, 너의 손맛이 느껴져서 참 좋았어.
누군가의 시간을 먹는다는 건
생각해 보면 꽤 감동적인 일이야.
심심한 시간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이잖아.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
점수도 없고, 인정도 없지.
그래도 엄마는 그 시간이 결국
너를 너답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해.
그 시간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학교에서는 정답을 찾는 법을 배우지만,
심심한 시간에는 질문을 찾는 법을 배울 수 있어.
정답은 늘 비슷하지만
질문은 사람마다 다르잖아.
그래서 심심한 시간은
결국 자기만의 질문을 갖게 하는 시간이야.
너는 지금
어쩌면 네 인생에서
가장 질문이 많은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몰라.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어떤 어른이 될까.
이 질문들은 교과서에도 없고
이 질문들의 답은 검색창에도 나오지 않아.
어른들도 사실은 바쁘게 움직이는 속에서
삶의 중요한 질문들을 피해 가곤 해.
하지만 심심한 시간은
그 질문들을 피해 갈 수 없게 만들어.
자꾸만 질문들을 마주치게 되겠지.
그리고 슬그머니 생각하게 만들겠지.
아이야.
엄마는 네가 이 시간을 너무 잘 보내고 있다고 생각해.
때때로 엄마가 엄마의 조급함을 숨기지 못하고 다그친 것 같아 미안해.
겉으로 보기엔 방 안에서 뒹굴거리는 것 같지만,
바로 지금 이 시간에,
네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고 있어.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배우고,
계획하고 준비해야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 속에서도
사람은 충분히 자라.
오히려 그 시간 덕분에
너는 자기의 색을 잃지 않게 될 거야.
네가 자주 얘기하잖아.
요리 시작하면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걸린다고,
유튜브에 나온 것처럼 빨리 되지 않는다고.
아이야.
요즘 우리 같이 요리 프로그램 자주 보잖아.
엊그제 ‘라구 소스’는 몇 시간 끓여야 하는 건데,
15분만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잖아.
보고 있으면 가끔은 인생도 요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 생각했어.
센 불에 급하게 볶으면
금방 익지만 맛이 깊어지지는 않을 거야.
약한 불에 천천히 두면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향이 스며들어.
지금 너의 시간은
아마 약한 불 위에 올려진 냄비 같은 시간일 거야.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속에서는 천천히 맛이 깊어지고 있는 그런 시간일 거야.
그래서 엄마는
요즘 네가 심심해하는 모습이
조금 보기 좋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너는 심심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어.
혼자서도 늘 사부작사부작 한 시간을 혼자 잘 놀았어.
어쩌면 오늘도 그렇게,
너는 방안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냉장고를 한 번 더 열어 보겠지.
그리고 또
별것 아닌 생각 하나가
네 하루를 조금 다르게 만들어 가겠지.
심심한 시간은
텅 빈 시간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가능성의 시간이니까.
그 심심함이
언젠가 네가 무언가를 시작하게 할 것이고,
어딘가로 향하게 할 것이고,
네가 원하는 어떤 사람이 되게 할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아서.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은
대단한 결심이나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심심한데 뭐 하지?”
라는 아주 사소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지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아이야.
지금처럼
조금 뒹굴거려도 괜찮고,
조금 느려도 괜찮고,
조금 빈둥거려도 괜찮아.
그 시간들이 결국 너를 너답게 만들어 줄 테니까.
엄마는
네가 무엇이 되든 상관없어.
단지 무엇을 하든
너의 시간이 너의 것이기를 바란다.
심심함 속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자기만의 하루를 채울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면
어디에서든 잘 살아갈 거라고 믿거든.
엄마의 방구석 셰프인 아이야.
그런데 엄마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폭탄 맞은 부엌, 어떻게 좀 안 되겠니?
부엌 좀 치우란 말이댜!!!!! ㅎㅎㅎㅎㅎ
너의 열혈 미식 시식단, 엄마가.
글에 들러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아라의 연재글]
월: 엄마는 퇴근 중 https://brunch.co.kr/brunchbook/onherwayhome
수 또는 목: 가르치지 않는 교육 https://brunch.co.kr/brunchbook/uneducated
금: https://brunch.co.kr/brunchbook/adultsdictation
일: 나의 일, 나의 삶 https://brunch.co.kr/brunchbook/workislife
[아라의 연재 완료 브런치북]
스무 살이 된 아이에게 1 https://brunch.co.kr/brunchbook/rewrite-being20
어른이 다녀보았습니다. 공동육아 https://brunch.co.kr/brunchbook/communitas
어쩌다 며느리, C급 며느리 https://brunch.co.kr/brunchbook/mysecondfamily
5시, 책이 나를 깨우다 https://brunch.co.kr/brunchbook/bookswakeme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