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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단 Aug 20. 2022

캐나다 PEI, 여행의 끝은 언제일까?

여행의 끝은 언제일까?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온 그 시간이 여행의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를 마치고 캐리어 수화물을 찾아서 공항 밖으로 나오던 순간, 그때를 여행의 끝이라 할 수 있을까. 공항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던 순간에 여행이 끝나는 걸까. 캐리어를 열고 짐을 정리하고, 캐리어를 창고에 넣는 순간에 여행이 끝나는 걸까. 


소설 속 앤의 시대에는 여행이 오늘날처럼 흔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아원에서 그린게이블즈로 오기 위해, 노바스코샤에서 배와 기차를 타고 에이번리 마을까지 이동했던 날이 어쩌면 앤의 첫 여행이었으리라. 여행의 설렘은 여정의 고단함을 덮고 달콤한 감정이 솟아오르게 만든다. 앤도 나와 아이들도 그러했다. 아이들은 좁은 비행기 안에서 오랜 시간을 앉아 있으면서도 지루함보다는 마냥 설레고 재밌어 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스무 시간 가까이 되는 비행시간도 짧다며 아쉬운 모습이었다. 


그린게이블즈에서 살게 된 앤은 다이애나의 친척인 조세핀 할머니로부터 초대를 받는다. 에이번리 마을에서 출발해 항구의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큰길과 언덕을 오르며 샬럿타운에 도착한다. 온 종일 꿈꾸는 듯한 시간을 보낸 앤은 특히 음악학교에서 여는 음악회가 끝난 뒤에 맥이 쑥 빠져버린다. 다시는 평범한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바닷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며 앤은 이렇게 말한다. "아, 살아 있다는 게 멋있고, 이렇듯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정말 기분 좋아." 이윽고 그린게이블즈에 도착한 앤은 매튜와 머릴러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아무튼 기막히게 즐거웠어요.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거예요. 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집으로 돌아온 일이에요."


아무튼 기막히게 즐거웠던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집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 날이다. 새벽부터 매미가 맴맴 장단을 맞추며 요란히도 풍악을 울린다. 예전 같으면 동요 '그대로 멈춰라'를 부르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은 창가에 앉아 매미소리보다 낮은 음으로 맴맴맴하고 화음을 맞춘다. 창밖 나무의 풍성한 녹색 잎들이 제각각 하늘거리며 조화로운 것처럼, 나의 입소리도 매미 소리와 안 어울리는 듯 잘 어울린다. 어젯밤 번개와 함께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 때문인지 아침 날씨가 선선해졌다. 그래서인지 매미소리가 어제보다 줄어든 것 같다. 한낮이 되고 기온이 올라가면 점점 더 많은 매미가 우렁차게 노래를 부를 것이다. 캐나다의 여름은 한국보다 시원했다. 그곳에서 가장 무덥던 한낮의 기온이 한국에서는 가장 선선한 날씨가 되었다. 나는 선선한 날씨를 좋아하고 매미는 무더운 날씨를 좋아한다. 오늘 새벽 기온은 더위와 선선함이 뒤섞여 있고, 나와 매미 모두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매미는 한낮의 무더위를 기대하며 노래하고, 나는 집에 돌아온 기쁨으로 더위를 가리며 노래했다. 여행의 추억은 평범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편안한지 느끼게 해준다. 특별하지 않지만 안온한 일상, 여행 이전의 일상이 그대로 다가와 안도감이 느껴진다. 


소설 속 앤은 길버트와 결혼하면서 에이번리 마을을 떠났다. 9년 쯤 지난 어느날 길버트의 아버지 장례식을 위해 에이번리 마을을 다시 찾았다. 장례식 이후 일주일 동안 에이번리에 머물던 앤은 다이애나를 만난다. 다이애나는 앤보다 먼저 결혼하고 에이번리에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영원한 우정을 맹세했던 날을 회상하며 다시 한번 맹세와 약속을 다짐한다. 언제나, 그리고 언제까지나. 꿈꾼듯한 시간이 지나고 앤은 남편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앤을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을 의자, 옷장 속의 옷들, 기쁘게 맞아주는 방들, 떠들썩한 연중행사와 조그만 비밀이 소곤거리는 집. 가는 내내 앤의 마음은 계속 노래를 불렀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기쁜 것은 행복한 일이야." 고향에서 친구와 보낸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한 집이었다. 캐나다에서 보낸 시간, 그보다 더 행복한 집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앤과 다르게 그것을 실감하는데까지 시간이 좀더 필요했다. 


오늘 아침에는 한 달만에 처음으로 쌀알을 씻어서 밥을 지었다. 현미와 차조를 넓은 그릇에 넣고 손으로 휘휘 젓는 촉감이 새삼스러웠다. 한국에서 쌀을 씻고 있는데도,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다. 아직까지 거실에 놓여 있는 캐리어때문만은 아니었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곧장 잘 준비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둘째 아이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울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몰라했는데, 아마도 캐나다 여행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한국에 돌아온 편안함, 캐나다를 떠나온 아쉬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중이 아닐까. 


나도 어제는 불쑥 떠오르는 기억과 감정들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 거실 시계가 열시를 지나고 있을 무렵에는, 지금쯤 플로우팅 푸드 코트에서는 오픈 준비를 하느라 한창이겠구나, 하며 머릿속에 기억이 떠올랐다. 비닐 포장된 핫도그빵을 잔뜩 양 손에 올리고 분주히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 11시 30분에 오픈한다는 표지판을 세워둔 칩 앤 프라이 가게 안에서 바쁜 여자의 모습, 그 맞은편 가게는 일찍부터 오픈해서 벌써부터 손님들이 주문을 하고 있다. 


한동안 거의 매일같이 가던 샬롯타운 도서관도 떠오르고, 그 안 카페에서 마시던 커피와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하거나 대화를 하던 사람들도 떠오른다. 내가 자주 앉았던 그 자리에는 오늘은 누가 앉아 있을까. 그 자리에서는 그린 게이블즈 초컬릿 상점이 아주 잘 보인다. 빅토리아 로우 거리도 보이는데, 밤이 되면 눈부시게 반짝이는 곳이다. 


캐나다 PEI 샬롯타운 도서관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보았던 풍경



캐번디쉬에 도착해서 매일같이 갔던 '여행자를 위한 슈퍼'에서 두 번의 환불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물건을 사고 물건값을 서로 셈했으니, 교환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사용하지 않은 튜브와 서핑보드 하나씩을 교환한 적이 있다. 단번에 알겠다며 교환을 해주고, 계산이 끝난 뒤에는 양손 엄치척을 해주던 직원도 생각난다. 비행기로 스무시간이 넘게 떨어진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일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지구 위에는 수많은 나라와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살아간다. 그걸 알면서도 직접 매일같이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버트, 1주일 동안 그린게이블즈의 앤으로 돌아가 있는 것도 기뻤지만, 집에 돌아와 잉글사이드의 앤으로 있는게 백배나 더 기뻐." 소설 속 앤은 이렇게 말했다. 앤과 다르게 나는 조금이라도 더 샬럿타운과 캐번디시에서 느꼈던 감정에 사로잡혀 있고 싶어진다. 나의 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간은 무심히 흘러간다. 한국에 도착했으니 이제 한국에서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 한 달전에 남겨두었던 여름 컬렉션 캡슐커피도, 아이들에게챙겨주던 유산균도 참을성있게 그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국 직전까지 준비 목록과 일정을 기록했던 보드판도 글자를 지우지 않고 그대로였다. 모든 것들이 한 달을 훌쩍 뛰어넘어 다시 나에게 왔다. 사라진 건 통장 잔고뿐이다. 아, 돈벌어야겠다. 


한 달 전과 비슷한 일상이 시작되고 있다. 나는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집안을 살핀다.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아이들은 각자가 좋아하는 한글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다가 놀다가를 반복했다. 두 아이 모두 한글로 쓰여진 책이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여행의 끝은 언제일까? 캐나다에서의 추억이 계속 나의 현재를 파고든다. 여행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온 안도감에 기뻐하다가도 문득 그리워진다. 이내 불안함이 스멀거린다. 내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고스란히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추억과 일상이 뒤섞여 달뜬 기분이 못마땅했다. 흰 우유에 캐나다에서 사온 메이플 시럽을 살짝 넣어 휘저었다. 하양과 나무색이 돌돌 말리며 서로를 밀어내는가 싶더니 금새 하나가 되었다. 우유 본래의 흰색보다 살짝 누런 흰색이었다. 고소함에 달콤함이 더해진 맛이라 아이들이 좋아했다. 나의 기분도 살짝 누런 흰색이 되어갔다. 일상에 추억이 더해져서 평범했던 일상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캐나다 여행 이후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한국의 하늘과 산과 나무를 사랑하게 된 점이다. 여행 전 빨강머리앤 소설을 읽으면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했다. 실제로 샬럿타운과 캐번디시에서 만난 풍경은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하늘을 바라보는데 구름이 모여있는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거실에 앉아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는데 나무 꼭대기에 달린 나뭇잎들이 바람이 반짝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과 나뭇잎의 연주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당장 저곳으로 달려가 나무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소설 속 풍경을 동경하면서도 정작 현실 속에서 빛나고 있는 아름다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자연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방식이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이제는 한국의 집에서, 거리에서 어느곳으로 눈을 돌려도 빛나는 장면이 가득하다. 소설 속 앤은 다이애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것이 무척 즐거워. 아침에는 언제나 아침이 가장 좋다는 기분이 들지만, 저녁이 되면 저녁이 더 좋은 것 같거든." 한국에 돌아와 아침 무렵에는 규칙적으로 울어대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저녁 무렵에는 주홍과 보라,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 신비한 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늘상 환희의 장면을 즐길 수 있으니 온종일이 행복하다. 


아이들과의 여행은 영어 문화 체험이 주된 목적이었다. 내가 풍경에 취해갈 때, 아이들은 낯선 장소와 언어에 익숙해져 갔다. 한 달동안의 여행으로 영어 실력이 부쩍 늘기를 바라는 건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아이는 여행 막판에 엄마의 지친 귀를 대신해 간단한 통역을 해줄 정도로 귀가 열렸다. 둘째 아이는 여행 전보다 영어학습에 대한 흥미가 높아졌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는 두 아이 모두 영어 말하기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영어로 말하는 장소에서 한 달을 보낸 아이들은, 영어도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걸 체감했다. 여행 전 집안에서 영어 대화를 시도할 때면 아이들은 쑥쓰럽거나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여행 후에는 누가 옆에서 영어로 말을 하든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마치 한국어를 대하듯이. 영어권 국가에서 한 달을 살아낸 경험은 아이들의 영어 발음과 목소리에 자신감을 더해 주었다. 단어와 문장을 내뱉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도 멋진 세계가 있으리라고 믿어요. 게다가 머릴러, 길모퉁이라는 것에도 마음이 끌려요. 길모퉁이란 그 앞이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모르는 데 매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초록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숲을 빠져나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반짝이는 햇빛이 있을지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풍경이며 눈이 번쩍 뜨이는 아름다운 곳이 있을지도 모르고, 에움길이나 언덕 또는 골짜기가 있을지도 몰라요." 인생은 길모퉁이를 돌아 길을 걷다가 다시 길모퉁이를 만나 돌아나가는 과정의 연속인 듯하다. 앤의 말처럼 길모퉁이에는 새로운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뻗어나갈지 모르는 매력을 가지고. 나와 아이들에게 여행은 새로운 길모퉁이가 되어 주었다. 경험과 추억이 현실과 뒤섞여 갸우뚱거리더니 새로운 균형 감각이 만들어졌다. 여행의 끝은 언제일까? 새로운 균형 감각으로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부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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