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과연 이보다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가는 빗줄기가 내리다 멈추고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다시 내리기 시작할 때는 전보다 훨씬 굵게 떨어졌다. 온 세상이 습한 공기로 가득 차 있고, 빗줄기는 습기를 먹으며 덩치를 키워갔다. 만화 고스트 바스터즈의 먹깨비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는지 어제 저녁부터는 세차게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였다.
캐나다에서 파랑 하늘의 영혼이 보내주는 햇살과 신선한 바람은 천국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캐번디시에 도착한 후로 비오는 날이 계속 이어졌다. 비가 줄어들면 회색 구름 사이로 희미하나마 파랑빛을 애써 내비치던 하늘이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부터 이어지는 굵은 빗줄기와 세찬 바람을 상대하며 무척 기진해진걸까. 오늘 아침 하늘은 파랑빛을 완전히 잃었다. 하기야 이런 폭우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겠다.
말갛던 하늘이 짙은 회색으로 변하는 동안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한국에서 반팔 티셔츠와 바지, 얇은 바람막이를 챙겨왔다. 그나마 바지는 긴 것으로 하나씩 챙겨왔지만 상체를 파고드는 추위를 막기에는 마뜩잖았다. 아이들과 나는 긴팔 레시가드를 입고 그 위에 반팔 티셔츠를 겹쳐 입었다. 나는 그래도 추워서 이불을 덮어 쓰고 오전 시간을 보냈다. 오후가 되어 빗줄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멈출 것인지 또다시 찾아올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외출을 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우리는 재빨리 옷가게로 가서 도톰한 긴팔 티셔츠를 하나씩 사 입었다. 파랑 하늘이 보내주던 따스한 햇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약기모가 덧대있는 티셔츠는 추위를 막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날씨는 여전히 천국이 아니었지만, 기분은 천국에 가까워졌다.
오늘 숙소로 새로 들인 것은 긴팔 티셔츠뿐만이 아니다. 옷가게에서 곧바로 돌아오기 아쉬웠던 우리는 몽고메리 문학공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걸으면 맥닐의 집터가 나타난다. 몽고메리 작가가 앤 소설의 초고를 썼던 외할아버지 맥닐의 집이다. 지금은 집의 토대만 남아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옆 건물은 서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문을 닫을 시간이란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왔던 길을 천천히 걸어서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비는 아주 얇게 간간히 떨어지고 있었다. 몽고메리 작가가 매일 걸었을 그 길을 아이들과 함께 걸었다. 오솔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넓은 들판이다. 하늘엔 아직 회색 먹구름이 머물고 있었지만, 들판에는 초록 줄기에 소담스럽게 매달린 새하얀 꽃들이 가득했다. 하얀 눈가루같다는 생각을 을 했었는데, 나중에 그 꽃이 '앤 여왕의 레이스'라는 별명을 가진 '야생당근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절묘한 별명이었다! 아주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서로 연결되어 동그랗고 하얀 레이스처럼 보였다.
새하얗고 탐스러운 레이스 사이에 듬성 듬성 노란 꽃이 보였다. 당근꽃과 비슷한 높이의 노랑꽃은 아마 좁은 길 건너편에서 이사를 온 것이리라. 길가 반대쪽에는 키가 큰 나무와 노랑꽃이 많았다. 오솔길에 다달았다. "엄마, 이것봐!" 큰 아이가 발 아래에서 노랑꽃 다발을 주워 들었다. 흙이 전혀 묻지 않고 마르지 않을 걸 보니 가지에서 떨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듯 하다. 나와 아이들은 심술궂은 장난을 친 범인으로 오전 내내 노호했던 폭우를 지목했다. 아름다운 노랑꽃 다발을 들고 새하얀 당근꽃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그리고 노랑꽃을 숙소로 가져와 물병에 물과 함께 넣어 주었다. 물병을 작은 종이봉투 안에 넣었는데, 슈퍼마켓 점원이 뚜껑 없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블루베리를 감싸 건네주었던 것이다. 앤의 집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가운데 붙인다. 제한된 재료로 제법 운치있는 오브제를 만든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세찬 비바람이 땅에 떨어뜨려놓은 골든로드
어제 오늘 발거벗고 온몸을 쏟아내던 폭우는 이제 길게 늘어진 검은 망토를 입고 서서히 멀어져갔다. 길게 늘어진 망토 자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지상에 얇은 비를 뿌리기도 했지만 분명 사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하늘의 파랑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이 좋다. 비가 갠 날씨는 상쾌하고, 폭우가 갠 날씨는 통쾌하기까지 하다.비가 거셌던 만큼 사라진 자리에서 느껴지는 안온함도 크다. 그리고 우리는 티셔츠와 노랑꽃 다발을 얻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긴팔 약기모 티셔츠를 입으려면 서너 달이 지나야 할 것이다. 겨울이 찾아올 즈음에 캐나다에서의 여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꽃다발은 우리가 캐번디시를 떠나는 날까지 초록과 노랑의 생기를 숙소 에 불어 넣어주었다. 마지막 날 시든 꽃다발을 퇴비쓰레기통에 넣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라고, 이번에는 어떤 폭우도 널 부러뜨리지 못하도록 굵고 강한 줄기를 가지고 태어나라고, 우리와 함께 있어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꽃의 이름은 '골든로즈'였다. 한국에서는 '서양미역취'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혼하는 신부의 부케를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하는데, 꽃처럼 꽃말도 아름다웠다. 긍정, 격려, 성공, 행복이라는 꽃말은 나와 아이들의 여행에도 무척 의미있는 단어였다.
어릴 적 누구나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는 광경이 신기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과학적 원리를 이해한 지금도 빗줄기는 신비롭게 느껴진다. 실제로 비는 언제나 우리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을 안겨준다. 우리에게 티셔츠와 노랑꽃을 전해준 것처럼. 가끔은 귀찮고 번거로운 것을 주기도 하는데, 일기 예보 비소식으로 챙겨야 하는 우산같은 것이 그렇다. 창 밖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는 마치 음악같은 경쾌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이런 날에는 커피 한 잔을 내려 손에 쥐고 창밖을 오래토록 바라봐야 할 것이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소나기처럼 당혹스러운 사건이 또 있을까. 어디로 걸어가고 있든지 우리는 어디에선가 몸을 숨기며 잠시 쉬어야 한다. 빗속으로 다시 뛰어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걸 결정하기까지는 멈춤 상태이다. 이렇게 비는 우리에게 여러가지 변화를 가져다 준다. 때로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만들기도 하는데, 소설 속 앤에게도 그런 순간이 두 번이나 찾아온다.
"실례합니다만, 내 우산을 함께 쓰시겠습니까?"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지는 11월의 흐린 날, 앤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강한 돌풍이 몰아쳐서 앤의 우산을 뒤집어 놓았고, 앤은 필사적으로 우산에 매달렸다. 그때 우산을 함께 쓰자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키크고 잘생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 레드먼드 대학의 복학생인 로열 가드너였다. 반년 전쯤 길버트의 사랑 고백을 거절하고 줄곧 '꿈속의 왕자'를 기다리던 앤이었다. 앤은 이보다 더 자신의 이상과 똑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로열 가드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졸업을 할 때까지 2년 동안 연인으로 지낸다. 졸업 직후 가드너는 앤에게 청혼을 하는데, 앤은 그순간 자신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절한다.
소설 빨강머리앤에서 비가 내리는 날은 드물게 등장한다. 앤과 로열 가드너가 만나던 날처럼 비는 환희의 순간을 가져온다. 물론 환희의 결말까지 보장하는 건 아니었지만. 또다른 비는 앤에게 절망의 소식을 안겨주었다. 대학 졸업 후 에이번리로 돌아온 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7월의 어느 밤에 쓸쓸하고 황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격력한 여름태풍이 바다를 거칠게 흔들었고 이윽고 빗방울이 그린게이블즈의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함께 살고 있던 아이, 데이브가 앤에게 말했다.
"저, 누나, 길버트 형이 죽게 되어 있다는 걸 누나는 알아?"
머릴러와 린드 부인은 새파랗게 질려있는 앤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만, 곧 이은 데이브의 말에 앤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해리슨 씨가 아까 저녁 때 여기 와서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말하던걸." 에이번리 마을에는 밤새도록 폭풍이 사납게 날뛰었고, 새벽이 되서야 겨우 그쳤다. 창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밤새도록 절망에 빠졌던 앤은 길버트가 고비를 넘기고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길버트가 완전히 회복된 9월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산책을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앤이 내 머리를 내려쳐 석판을 깨뜨렸던 그날부터 줄곧 앤만을 사랑해 왔어." 길버트의 고백을 듣고 앤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길버트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그날 밤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아, 나는 알게 됐어, 그때 알았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었어." 폭풍 속에서 앤은 길버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절망했다. 하지만 결말은 환희로 가득찼다.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세찬 비는 앤에게 거짓사랑과 진실한 사랑을 구분할 수 있는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소설 속 앤은 에이번리 마을에서 환희와 절망을 느꼈다. 에이번리 마을의 모델이 된 이곳 캐번디시에서 나와 아이들도 폭우를 만났다. 앤보다 100여년 후의 현실 세계에서, 비는 우리에게 어떤 사건을 가져다 주었을까.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폭우 때문에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비가 그친 오후에야 밖으로 나가 긴팔 티셔츠와 노랑꽃다발을 숙소로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날 우리가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바로 폭우가 몰아치던 그 시간 안에 있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해 좀이 쑤신 아이들이 음악을 틀어달라고 요청했다. 캐번디시 숙소는 침대, 식탁, 쇼파가 구비되어 있는 원룸형 집이다. 나는 식탁과 의자를 벽쪽으로 바싹 붙였다. 두 아이가 활동할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신나는 한국 가요가 울려 퍼졌고 아이들은 팔 다리를 흔들어대며 춤을 추었다. 그 사이에 식사 준비가 끝났다. 식탁을 조금 끌어당겨 음식을 놓은 후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이제 가요가 아니라 클래식한 곡을 듣고 싶단다. 나는 검색을 하다가 모짜르트 연주곡 모음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활개치던 숙소 안 공기가 잔잔해졌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곧바로 아이들의 항의가 시작되었다.
"이거 아니야!"
좀더 경쾌해야 한다며 다른 곡을 들려달라고 했다. 즐겨찾기를 해두었던 카페 뮤직 BGM 채널의 실시간 방송을 재생했다. 가볍고 경쾌한 재즈풍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빗소리와 제법 잘 어울렸다. 비와 재즈에 커피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곡도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채널을 옮기며 여러 음악을 들려주었다. 첫 소절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싫어를 외쳤다. 그냥 이거 듣자, 하고 설득해보지만 아이들의 음악 취향은 확고했다.
"베토벤 바이러스 들려줘!"
큰 아이가 생각났다는 듯이 콕 집어서 베토벤 바이러스를 들려달란다. 아, 밥을 먹으면서 그 곡은 좀 아니지싶었지만 2대 1의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빠바밤~빰~빰~빰~빠라밤~빠바바바빰!빰!빰! 빠르고 힘이 넘치는 피아노 연주음이 숙소 안을 찌르기 시작했다. 어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는 듯했고, 이 속도감으로 밥을 먹다가는 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열심히 몸을 흔들어가며 잘도 밥을 먹었다. 이어서 베토벤 비창 3악장 오케스트라 연주곡을 재생했다. 부드럽게 편곡되어 제법 밥을 먹을만 했다. 두 아이는 여러 악기가 연주하니 피아노 독주만큼 강하게 들리지 않아서 어색하단다. 훨씬 더 세고, 빠르고, 거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들과 음악 취향을 맞추는 과정은 쉽지 않다.
피아노 독주로 연주된 베토벤 바이러스를 몇 번 더 반복해서 듣는 동안 식사가 끝이 났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세고, 빠르고, 거친 음악을 들으며 밥을 먹는 마음이 심란했다. 흥겹게 식사를 마친 두 아이는 이번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곡을 듣는데 동의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 '인생의 회전목마', 이 곡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오케스트라 연주곡으로 들으면 아련한 감정이 뭉글뭉글 솟아오른다. 아이들도 나도 마음이 흡족해졌다. 내친 김에 히사이시 조 감독의 애니메이션 음악 연주곡 모음을 재생한다. 우리 셋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 취향을 찾는데 성공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 안에 고인 감정이라도 깨닫지 못하면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다. 소설 속 앤은 길버트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을 깨닫기 전까지 그를 계속 밀어냈다. 비 오는 날 사람의 감각은 좀더 예민해진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오래토록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정을 발견하기도 한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오감이 모두 바깥 활동에 집중하게 되지만, 비가 오는 날은 좀더 내면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비가 오는 날에는 조금 차분해지기 마련이다.
폭우로 온 세상의 기운이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거센 빗소리만 고독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반면에 숙소 안은 소란스러웠다. 틀어놓은 음악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협점을 찾기 위해 서로 오고가는 대화때문이기도 하다. 큰 아이가 말하고, 둘째 아이가 말하고, 내가 말하고, 다시 돌아가며 말했다. 동의하고, 반대하고, 다시 의견을 이야기하고, 주장하고, 그렇게 서로의 의견을 조율했다. 아이들도 나도 자신의 의견만 고집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의견을 제시하고 상대방의 생각도 함께 들었다. 어떤 부분은 양보할 수 있고 어떤 부분은 꼭 하고 싶다고 표현했다. 상대방이 그은 선을 넘지 않고 셋의 의견을 절충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을 넘어야만 할 때는 서로 공평하게 배려와 양보를 배분했다. 사실 우리는 캐나다에서 줄곧 이렇게 서로 맞춰가며 생활을 해왔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갈지에 대해 논의했고 결정대로 움직였다. 그랬다, 움직였다! 곧바로 행동하느라 아이들과 나의 대화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 안에 머물렀던 대화의 구조가 이토록 성숙했다는 걸 폭우 속에서 처음 깨달았다. 아이들이 이렇게나 성장했구나! 깨달음 뒤에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큰 아이가 더욱 든든하게 느껴지고, 어린 줄만 알았던 둘째 아이도 제법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아이들도 엄마의 관점 변화를 눈치챌 것이다. 엄마의 깨달음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자연스럽게 변화시킬테니까.
"내일은 비가 안 온다는데, 우리 어디로 갈까?"
바다로 가자! 기대감을 한껏 담아 외치는 두 목소리가 겹쳐졌다. 나 역시 바다가 정답이다. 비 갠 후에는 파도가 놀기에 적당하게 일렁이기 때문이다. 셋의 의견이 단박에 일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폭우가 그것을 해냈다! 파랑 하늘의 영혼은 우리가 섬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을 선사한다. 반면에 세찬 폭우의 회색 하늘은 우리를 숙소 안에 얽어맨다. 하지만 내면의 관계에 좀더 귀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니 또다른 의미에서 천국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외면과 내면, 그 둘을 모두 풍요롭고 조화롭게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일까. 파랑으로도, 잿빛으로도 변하는 캐번디시 하늘에 무척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