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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단 Oct 15. 2022

'아직 쓰이지 않은 시의 영혼' 을 만나다

"저기 좀 봐, 저 시가 보이니?"


앤이 갑자기 개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자작나무 사이 풀섶에 함께 앉아 있던 세 사람이 앤을 바라본다. 다이애나, 제인, 프리실라와 앤은 봄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옆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이제 막 앤이 가져온 레모네이드를 마시려는 참이었다. 제인과 다이애나는 자작나무에 고대문자가 새겨져 있나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저기, 시냇물 속의, 저 초록색 이끼가 돋은 통나무 말이야. 그 위를 물이 온화한 물결을 일으키며 마치 빗으로 빗어내리듯 줄줄 흐르고 있잖니, 그리고 시냇물 바닥까지 한줄기 햇빛이 비스듬히 비쳐들고 있어. 아, 저토록 아름다운 시는 본 적이 없어."


제인은 시라면 행과 절이 있어야하고 따라서 그 장면이 시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앤에게는 의심할 바 없는 시였다. "행이나 절은 시의 겉치레 의상에 지나지 않아. 진짜 시는 그런 것 속에 있는 영혼을 말하지, 그리고 저기 있는 아름다운 시 한 편은 글로 표현되지 않은 시의 영혼이야."


아직 쓰이지 않은 시의 영혼이라,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나는 한국에서 봄 소풍 장면을 읽으면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풍경을 상상했다. 앤은 영혼이 빛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어떤 영혼은 격렬하게 떨면서 찌를 듯이 파고들고, 어떤 영혼은 부드럽게 빛나고, 또 어떤 영혼은 아련하고 투명하다고 설명했다. 소설 빨강머리앤에 등장하는 '하얀 환의의 길'과 '연인의 오솔길', '빛나는 호수', '도깨비숲' 을 걸으며 여러 모습의 영혼을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시의 영혼이 보여주는 이야기들을 영롱한 구슬을 꿰듯 진솔하게 엮고 싶었다. 





캐나다 토론토 공항을 거쳐 샬럿타운 공항에 도착해서 나는 첫번째 시의 영혼을 만났다. 공항 건물 밖을 나온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하늘에 맑고 부드러운 영혼이 담겨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하늘색이었다. 공항 화단의 꽃풀과 나뭇잎이 바람에 간들거렸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이 바람을 타고 나와 아이들의 머리카락에서 살랑거렸다. 편안하고 홀가분한 기분이 느껴졌다. 샬럿타운의 낯선 풍경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선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산들바람이 부는 오솔길을 머릴러와 함께 걷던 앤은 이렇게 말했다. "아, 바람에는 상상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어요!" 그것은 정말이었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바람은 언제나 시의 영혼을 싣고 다가왔고, 분명 상상의 여지가 충만했다!


부드러운 하늘색으로 빛나는 영혼은 우리가 섬에 있는 내내 묵묵히 곁을 지켜주었다. 만약 자연과 인간이 반려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반려 영혼은 하늘이었을 것이다. 샬럿타운의 여름은 새벽 다섯시 무렵이면 밝아온다. 나와 아이들은 외출을 하지 않을 때면 숙소의 넓은 발코니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길다란 야외탁자와 의자에 앉으면 낮고 파란 하늘과 각양각색의 하얀 구름이 보인다. 아침에는 새들이 지저귀며 부지런히 날아 다니고, 오후가 되면 비행기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장난감처럼 손에 잡힐 듯이 날아가곤 한다. 아이들은 의자 옆 공간에 해바라기씨와 물을 각각 넣은 두 개의 그릇을 놓아 두었다. 우리집 계단을 올라 발코니를 방문했던 다람쥐를 위한 먹거리였다. 아이들은 다람쥐에게 스며든 작고 귀여운 시의 영혼을 발견한 것이리라. 거처를 캐번디시로 옮겨서도 아이들의 다람쥐 사랑은 계속 되었다. 한달 여행이 끝나던 날 아침이었다. 그날은 캐번디시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샬럿타운으로 가야했다. 다람쥐 한 마리가 숙소 난간 위에서 꽤 오랫동안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잔디로 덮여 있던 땅 속 집도 보여주었다. 두 아이는 환희에 들떠서 연신 조잘댔다. 다람쥐에게 스며든 아직 쓰이지 않은 시의 영혼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 겉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샬럿타운 숙소에서 바라본 하늘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은 주로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도깨비숲'에서 격렬하게 찌를 듯이 파고들던 영혼을 만났다. 소설 빨강머리앤에서 앤과 다이애나는 집 근처 가문비나무숲을 두고 '도깨비숲(Haunted wood)'이라고 상상했다. 어느 해질녘, 앤은 배리 부인에게 다이애나의 앞치마 옷본을 빌려오는 심부름을 맡게 되었는데, 머릴러는 지나친 상상을 하는 앤의 버릇을 고쳐줄 생각으로 반드시 가문비나무숲을 통과해 다녀오라고 시켰다. 앤은 자신의 상상때문에 두려워하며 '도깨비숲'을 달렸고 더이상 이상한 상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앤에게 깨달음을 준 '도깨비숲'은 캐번디시 그린 게이블즈 헤리티지 플레이스에 실제로 존재한다. 이곳은 작가 L.M.몽고메리의 맥닐가 사촌들이 살았던 장소인데, 소설 속 초록지붕집과 농장, 연인의 오솔길, 그리고 도깨비숲에 영감을 주었다. 나와 아이들은 초록 지붕집에서 통나무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도깨비숲으로 들어갔다. 앤이 머릴러의 머릴러의 심부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며 구르듯이 건넜던 통나무다리이다. 이내 울창한 나무와 숲으로  둘러쌓인 오솔길이 이어진다. 붉은 흙길 위는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양 옆으로, 그리고 머리 위로도 녹색 잎이 가득했다. 키가 큰 나무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같은 침엽수였는데 가늘고 뾰족한 잎이 무수했다. 아래로 낮은 풀나무들은 대체로 둥근 잎을 가지고 있고 보라, 노랑, 빨강, 흰 빛깔의 조그만 꽃과 열매가 달려 있다. 가장 아래쪽에는 앤이 사랑했던 양치류 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바라보니 규칙적으로 배열된 고사리의 잎이 귀여우면서도 우아하게 느껴졌다. 아, 도깨비숲이 이렇게 아름다운 오솔길이었다니!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도깨비가 친근하게 다가올 것만 같다. 저만치 앞에서 뛰듯 걷는 두 아이는 나무들이 어깨동무하며 만들어 낸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오솔길이 끝나고 조금 넓은 터가 시작되는 그곳에 도달했을 때 나는 왜 이곳이 '도깨비숲'인지 알게 되었다.



도깨비숲의 작은 꽃풀과 고사리





아이들이 벌써 도착해서 놀고 있는 동그란 터는 '넓다'고 표현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단지 우리가 지나온 좁은 오솔길보다 좀더 넓을 뿐이다. 나란히 줄을 맞춰 서 있던 나무들이 이곳에서는 여기 저기 제 멋대로 서 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산 속 풍경과 비슷하다. 우리는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길'이라고 부를만한 지점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앞뒤쪽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오가는 사람을 찾았다. 나와 아이들은 서로 바싹 붙어서 걸었는데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소설 속 표현처럼 숲은 침침했다.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음침한 분위기가 맴돌았고, 이곳은 무서운 '도깨비숲'이 틀림없었다! 밑동부터 시작해서 기둥 전체에 삥 둘러가며 가지가 솟아나온 나무를 발견했을때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격렬하고 찌르는 듯한 영혼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오래된 나무였다.


동그란 터는 다시 좁은 길로 이어졌고, 우리는 발걸음이 느려졌다. 얼마나 더 가야 도깨비숲의 끝이 나타날 지 가늠할 수 없었다. 출발 지점에서 우리보다 앞서 떠났던 가족들이 아직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앤과 다이애나가 상상한 하얀 옷을 입은 여인, 목 없는 남자, 유령과 해골이 나타날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급기야 우리는 '무섭다'는 말을 서로 입밖으로 꺼낼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오던 길을 거슬러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척 빨라졌다.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애써 태연한 척을 해야했다. 나 혼자였다면 앤처럼 구르듯이 뛰어갔을 터였다. 두 아이 뒤를 바싹 따라 걸으며 누구라도 사람이 나타나길 바랐다. 그때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걷는 남자 한 명이 보였다. 그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가야하냐고 물었고, 숲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우리도 가다가 되돌아오는 길이라서 정확히 얼마나 더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꽤 오래전에 앞서서 간 사람들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짧은 대화 후에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도깨비숲을 지키고 있는 나무의 영혼



드디어 아름다운 오솔길이 나타났다. 휴, 안심이 되면서도 두근거렸던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통나무다리가 가까워오자 우리 셋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을 여유가 생겼다. 다시 천천히 주변의 나무와 꽃을 감상하며 걸었다. 아이들도 다시 재잘거리며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놀기 시작했다. 다시 찾은 평온함을 즐기고 있을 때, 아까 우리와 마주쳤던 남자가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상기된 얼굴이었다. 셋이서도 무서웠던 길을 혼자 가려니 꽤나 긴장했을 것이다. 빠르게 걸어나오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우리 앞을 지나갔다. 나는 궁금해졌다. 우리보다 앞서 출발한 그 가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왜 되돌아나오지 않는 걸까,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도깨비라도 나타난 것일까, 아까 보았던 오래된 나무에 숨어 있던 영혼이 그들에게 장난을 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나의 상상을 머릴러가 알게 된다면, 지나친 상상을 하는 버릇을 고쳐야한다며 다시 도깨비숲으로 들어가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상상이 이어지지 않는다. 머릴러의 처방은 앤에게도 나에게도 효과가 분명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도깨비숲을 끝까지 지나가면 도로가 나온다. 도로 주변으로 몽고메리가 잠든 캐번디시 묘지, 몽고메리 기념 공원,  어릴 적 살았던 집터, 일했던 우체국, 남편을 만난 교회가 포진해 있다. 우리보다 앞서 출발했던 가족은 아마 그곳들을 둘러보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도깨비숲은 가문비나무숲이면서 전나무와 자작나무가 있는 곳이다. 도깨비숲은 여러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가문비나무(spruce)가 있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전나무(fir)가 있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실 가문비나무와 전나무는 일반인들이 구별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닮았다. 나무 기둥이 하얀 자작나무는 쉽게 구별이 가능하지만, 그 둘은 정말 비슷하다. 앤은 전나무를 유독 사랑했다. 해질녘 도깨비숲에 들어가는 걸 무서워했지만, 전나무 소리를 듣는 건 좋아했다. 9월의 해질녘 앤은 소떼를 몰며 '연인의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쳐지나가 전나무를 살랑거리게 했고, 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달콤함 음악을 듣는 기분을 느꼈다. 


에이번리 교사로 일하는 동안 앤은 길버트, 다이애나 등과 함께 마을개선회를 결성했다. 마을회관의 지붕을 수선하기 위한 기부금을 모금하기 위해 다이애나와 마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멀리서 전나무의 마른잎 향기가 풍겨왔다. 이븐 라이트 씨가 자르고 있는 울타리에서 나오는 냄새였는데, 아마도 전나무로 만든 울타리였으리라. 앤은 전나무 향기에 행복해하며 다이애나에게 말을 계속했다. "천국에는 전나무 마른잎이 없을지도 몰라. 숲속을 거닐며 전나무 마른잎 냄새를 맡지 못한다면 천국도 완전하다고 할 수 없겠지. 어쩌면 마른잎은 없고 향내만 감돌고 있을지도 몰라, 천국이니까. 그래, 틀림없어. 저 멋진 향기는 전나무 영혼임이 분명해. 그러니까 천국에는 물론 영혼만 있는 거지."


안타깝게도 나는 캐번디시의 '도깨비숲'에서 향기로운 전나무의 영혼을 만나지 못했다. 붉은 오솔길에 사람 발걸음의 흔적이 뚜렷했지만, 나무의 영혼들은 앤의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호젓한 숲길을 지켜왔으리라. 전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영혼은 침엽수답게 뾰족하고 날카로웠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앤과 다이애나의 상상처럼 소연하고 험상궂은 유령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것 같다. 앤은 다이애나와 기부금을 모금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마다 성격이 가지각색이라고 느꼈다. 이러한 깨달음은 비단 사람 세상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 듯하다. 숲의 세계에도 각양각색의 영혼들이 함께 존재한다. 도깨비숲 오솔길에서 침엽수 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잎이 동그란 나무를 기억한다. 작은 마름모의 각을 동그랗게 다듬은 것처럼 생긴 작은 잎이 나무가지마다 수북하게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기 저기서 살랑거렸는데, 그때마다 빛이 닿아서 반짝였다. 이 나무의 영혼은 수백개의 스팽글을 손으로 꿰어서 만든 화려하고 우아한 옷을 입고 나타날 것 같다. 우리는 이 나무 덕분에 도깨비숲에서의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나무의 영혼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달콤하고 편안한 음악으로 우리를 다독여주었다.



캐번디시의 잔잔한 해변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자연에는 수많은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 그중에서도 나와 아이들을 동시에 매혹시킨 영혼은 드넓은 캐번디시 바다에 스며있었다. 샬럿타운의 바다는 걸어서 들어갈 수 없는 항구이다. 하지만 캐번디시의 바다는 한참을 걸어도 아이들의 무릎 정도까지 오는 해변이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얀 구름이 풍성하게 하늘을 차지하고 있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너울거릴 때면 바다 수평선을 접어서 데칼코마니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저멀리 붉은색을 드러내고 있는 해안절벽은 이곳이 한국의 바다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킨다. 


바다의 영혼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캐번디시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해변을 찾았지만 그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떤 날은 철부지 장난꾸러기처럼 세찬 파도를 해변으로 마구 던져버린다. 또 어떤 날은 사춘기 아이처럼 잔잔하게 어른스러운 채 하지만 한번씩 크게 일렁인다. 가끔은 사색에 빠진 중년처럼 온화하게 해변으로 천천히 다가오기도 한다. 바다의 영혼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다가오는 건 무척 즐거운 일이다. 비가 온 다음날은 세찬 파도를 향해 서있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놀이가 되었다. 맑은 날 뒤에는 파도가 잔잔해져서 수평선을 향해 제법 멀리까지 걸어나갈 수 있었다. 흐린날은 바다가 차가워서 모래놀이에 집중하게 되고, 해가 쨍쨍한 날은 바다 속에서 한참을 놀 수 있었다. 


아침에 다람쥐가 숙소 난간 위에서 꽤 오래 포즈를 취하고, 잔디 밑 다람쥐굴을 알려주던 날, 우리의 한달 여행이 끝나가던 그날은 무척 운이 좋았다.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들이 우리에게 친절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다람쥐에 스며든 영혼을 시작으로 하늘과 바람, 바다에 스며든 영혼들도 우리에게 선물을 해주었다. 이날 우리는 가장 놀기 좋은 파도, 날씨, 바람을 경험했다. 전날 오후에 비가 적당히 와서 파도가 적당히 높았고, 해가 비추어 날씨가 따뜻했으며, 바람이 불어와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었다. 


캐번디시 해변에서는 좀처럼 튜브를 탈 수가 없다. 이안류때문에 구명조끼를 제외한 둥둥 뜨는 장비의 사용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파도를 탈 수 있는 서핑보드를 이용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서핑보드는 너무 짧아서 파도를 탈 수 없었다. 그런데 이날은 오전 내내 튜브를 탈 수 있었다. 영혼들이 만들어준 선물 덕분이다. 대서양 파도를 한참 타고 놀던 아이들이 이제는 모래사장에서 땅을 파겠다고 한다. 돗자리를 깔아둔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오늘은 키만큼 깊은 모래 구멍을 파보겠단다. 우연의 일치로 바로 옆에서 한국의 중학생정도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흙을 파내고 있었다. 둘째 아이는 누나와 함께 열심히 땅을 파다가 한번씩 형이 파고 있는 구멍 속 깊이를 들여다 보았다. 일종의 경쟁의식과 동류의식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하다. 꽤 깊게 구덩이를 파고 있는데 금발의 남자아이가 우리쪽으로 걸어왔다. 내가 무엇을 도와줄까, 하고 아이들에게 묻더니 함께 모래 작업을 시작한다. 


세 명의 또래 아이들이 땅을 파고 돌로 주변을 장식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잠시 돗자리 위에 누웠다. 모자와 비치타올을 이용해서 얼굴과 몸에 직접 닿는 햇볕을 차단했다. 모자에 시야가 가려지니 청각이 예민해졌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누워있는데, 귓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예 눈을 감았다. 청각뿐만 아니라 촉각도 예민해졌다. 파도 소리와 웅웅거리는 소리가 섞여서 들여왔다. 햇살이 미처 가려지지 못한 귀와 발가락끝에 닿는 느낌이 따뜻했다. 바람이 부드럽게 귀를 어루만지더니 목덜미로 삐져나온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간질간질하면서 편안했다. 소설 속 앤의 말처럼 바람은 상상의 여지가 충분하다. 공상에 빠지기 딱 좋은 상태다. 아니, 사실은 낮잠에 빠지기 딱 좋은 상태였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점점 옅어지더니 다시 또렷해지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하지만 단잠을 잔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붙임성 좋은 금발의 남자아이는 나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옆쪽 아이의 구덩이 만들기까지 동시에 거들고 있었다. 두 개의 구덩이 모두 아주 깊게 파져 있었고 입구 주변에 성곽을 쌓고 있었다. 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래에 물을 넣어 덩어리를 만들어야 한다. 금발 남자 아이는 작은 플라스틱 양동이를 들고 바다와 모래사장을 오가며 양쪽에 바닷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이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같은 디자인의 원피스형 수영복을 입은 두 명의 여자아이가 보였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자매인 듯 했다. 언니는 텀블링을 하고 있었는데, 두 손을 땅에 대고 물구나무를 섰다가 발끝부터 땅에 닿으며 회전하는 몸짓이 기계체조 선수같았다. 어린 동생은 언니를 보며 텀블링을 따라했는데 곧게 회전하지 못하고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면서도 계속 언니를 따라하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자매를 보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 한 명이 오더니 텀블링을 시도하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는다. 해변에서 아이들은 쉽게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텐드와 돗자리 위에 몸을 누이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캐번디시 해변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는 듯 했다. 



캐번디시 바다의 영혼은 여러가지 모습이다



캐번디시 숙소의 체크아웃은 오전 열시까지였다.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준 다람쥐에 깃든 영혼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렌트카에 모든 짐을 실었다. 그리고 곧장 해변으로 달려왔다. 만족스러운 해수욕을 즐기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오후 다섯 시에 가까워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신에 하늘을 날던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으로 내려와 머릿수를 채웠다. 그들의 저녁 식사 시간이기 때문이다. 갈매기는 모래 위에 세모난 발자국을 남기며 사람들 사이를 태연하게 걸어다닌다. 주변 나무에서 떨어져 해안까지 굴러온 동그란 과실을 쪼다가 부리에 끼운 채로 걸어다니기도 한다. 이내 그것을 버리고 다른 먹잇감을 찾아 모래 사장 어딘가를 쪼아댄다. 끼룩끼룩 서로 대화하듯 번갈아 가며 울음소리를 낼 때도 있다. 나와 아이들에게 가까이에서 걸어다니는 갈매기는 무척 신기했다. 우리는 갈매기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서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갈매기들은 용케도 낌새를 눈치채고 빠른 걸음으로 뛰듯이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난다. 그래도 계속 따라가니 귀찮은 듯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오후 여섯 시가 지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도 더이상 시간을 늦출 수 없었기에 해변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떠난 모래사장 위에는 낮에 만들어 놓은 모래 작품들이 남겨져 있었다. 두 아이와 걸어나오면서 작품들을 감상했다. 어떤 모래성은 지하실이 만들어져 있어서 신기했다. 우리가 만든 것과 비슷한 깊은 구덩이도 있었다. 악어다! 아이들이 외쳤다. 악어? 모래 사장 위에 악어 한 마리가 보였다. 제법 정교하게 부조로 만들어진 악어였다. 하얀 조개 껍질로 이빨을 표현하고, 길쭉한 돌을 다리 끝에 여러개 붙여 발가락을 표현했다. 꼬리와 등, 다리 위쪽에 일정한 크기의 갈색 돌이 절반은 모래 속으로 박히고 나머지 절반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울퉁불퉁한 악어껍질의 촉감이 느껴지는 듯 했다. 모래 사장 위에는 갈매기가 먹다 남긴 과실 조각도 떨어져 있었다. 사람과 갈매기가 남긴 흔적은 곧 바다의 영혼이 쓸어갈 것이다. 지금 해변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운이 좋다. 바다의 영혼이 지우개질을 시작하기 전에 멋진 작품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저녁 6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해변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언젠가는 노란 스쿨버스 두 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청소년 무리와 어른들이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피자 박스를 수십 판 정도 들고 걸었다. 대서양을 바라보며 저녁 식사로 피자를 먹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마지막 피자 조각을 먹을 때 쯤이면 선셋을 볼 수 있으리라. 내일은 새로운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겠지. 어쩌면 그들도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샬럿타운 공항부터 캐번디시 해변까지 파랑 하늘의 영혼은 줄곧 우리 곁에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섬에서 우리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의 영혼'을 수차례 만났다. 친밀하고도 낯설게 다가온 자연의 영혼들에게 나와 아이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전나무 마른잎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 하던 앤의 목소리를 빌려서 표현하고 싶다. 


"이런 날에 살고 있는 사람은 행복할지어다. 이곳이 천국이리니."



누가 만들었을까, 캐번디시 해변의 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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