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길버트!
지금은 해질녘이야. 그러고 보니 '해질녘'이란 좋은 말이잖아? 저녁 무렵보다 훨씬 좋아. 벨벳 같은 차분한 느낌으로 어두운 그늘이 있고, 그리고, 그리고, 그야말로 '해질녘'다운걸.
나는 낮에는 이 세상 사람이고, 밤에는 잠과 영원의 것이야. 하지만 해질녘에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나는 오직 나만의 것이 돼. 아니 우리 둘의 것이 되는 거야. 그래서 이 소중한 시간을 바쳐 길버트에게 편지를 쓰려고 해."
어두운 그늘이 지기 시작하는 해질녘, 앤은 사랑하는 길버트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나와 아이들은 푸르스름해지는 항구를 걸었다. 샬럿타운의 여름은 저녁 무렵부터 한낮과는 다른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날이 선선해지고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멋진 야경을 감상하며 늦은 저녁 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술을 마시기에 딱 좋은 날씨이다.
항구의 불빛, 빅토리아 국립공원 해변의 노울, 빅토리아 로우 거리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그것들을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두 아이가 밤 9시 전에 잠들어야했기에 저녁 시간 이후 외출은 숙소와 아주 가까운 놀이터 정도만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더 멀리 걸아나왔다. 저녁 식사로 숙소에서 랍스터 두 마리를 삶아 먹었는데 배부름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여전히 부른 배를 소화시키기 위해 좀더 멀리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그냥 앞으로 걸었다. 십 분쯤 걸으니 눈앞에 빨갛고 커다란 2022 숫자 조형물이 나타났다. 항구에 다다른 것이다.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하늘과 바다가 똑같이 어두운 파랑색으로 변해갔다. 나무와 건물들이 중간에 띠를 두른 것처럼 위치하지 않았다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가로등과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이 어슴푸레했다. 날이 완전히 깜깜해지면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낼 터였다.
한국에서도 한여름이 아니면 좀처럼 밤마실을 하지 않으니 흔치 않은 기회다. 게다가 바닷가의 야경이라니! 어둑을 넘어 깜깜함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지만 우리는 계속 숙소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가장자리를 따라 설치되어 있는 나무 데크를 따라 걸었다. 나무 데크의 가장자리에는 폭이 넓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위쪽에 작은 전구들이 조르르 매달려 있어서 그 경계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낙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리라. 나무 데크는 상점 건물이 모여 있는 장소까지 이어져 있는데, 카우즈 아이스크림 상점과 기념품 가게를 지나 맛있는 음식을 파는 플로팅 푸드 코트까지 쭈욱 이어진다. 상점 건물의 지붕 테두리에는 동그랗고 노란 빛이 아주 촘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에 두르던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긴, 줄로 연결된 작은 전구들이었다. 건물마다 네모난 창문에서 노랗고 하얀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여름이지만 자꾸 크리스마스가 생각났다. 짙은 벨벳 바다 위로는 불빛이 그린 그림이 보였다. 지붕과 난간의 작은 불빛은 수면 위에 무수한 별 빛을 흩뿌렸고, 가로등 불빛은 물결을 따라 살랑거리는 막대를 띄웠다. 서늘한 밤공기와 황홀한 야경이 만든 분위기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걸었다. 이번에도 숙소의 반대방향으로.
소설 빨강머리앤에서 편지는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흔하면서도 중요한 통신 수단이다. 앤과 길버트는 에이번리 학교부터 킹스포드 레드먼드 대학교까지 줄곧 같은 길을 걸었다. 하지만 학사학위를 받은 이후부터는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한다. 앤은 서머사이드 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길버트는 레드먼드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다. 두 사람은 학사 졸업 직후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두 사람은 많은 편지를 주고 받는다. 책 한 권이 거의 다 앤이 쓴 편지로 채워져 있을 정도이다. 3년 후 길버트가 의학공부를 마치고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서머사이드에서 앤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버드나무가 있는 '버드나무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곳에서 앤은 '동류정신'을 번뜩이게 하고 별안간 몸을 떨리게 만든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여덟 살인 금발의 조그맣고 핼쑥하며 슬퍼보이는 아이, 일리저버스였다. 그날 일리저버스는 아픈 시녀를 대신해 우유를 가지러 버드나무집에 왔다. 일리저버스는 할머니, 그리고 시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 일리저버스를 무척 엄격하고 냉정하게 다루었다. 상상력이 풍부한 일리저버스는 아무에게도 감시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날을 꿈꾸었다. 어린 소녀에게 '오늘'은 항상 힘겨웠기에, 언제가 오리라 믿는 행복한 날을 '내일'이라고 이름 지었다.
"엄마, 저기 예쁜 불빛이 있어!"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분홍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곳의 넓은 광장은 오늘 낮에도 지나온 곳이었다. 광장 맞은편에는 관광 안내 센터가 있다. 우리는 점심 식사 후 그곳에 가서 히포버스를 탈 예정이었다. 히포버스는 샬럿타운 시내와 바다를 운행하는 수륙양용버스이다. 며칠 전 비로 인해 예약이 취소되었고 오늘은 날이 좋아 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관광 안내 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히포버스가 고장이라서 오늘도 운행을 하지 않는단다. 실망감에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길 건너 광장 쪽에 설치된 공연 시설과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신나는 일을 발견하고 우리는 다시 발걸음이 빨라졌다. 웅웅웅~웅웅! 단조로운 소리에 적어도 음악 공연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무대 위에서 두 남자가 전기톱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람보같았다. 총대신 전기톱을 든 두 명의 람보는 사회자의 신호에 따라 통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양쪽이 모두 통나무를 자른 뒤에 무대 위에 있던 심판이 승자의 손을 들어 주었다. 람보들이 바뀌면서 경기가 계속 진행되었다. 무척 생소하고 단조로웠지만 아이들은 흥미로워했다.
프린지페스티벌! 샬럿타운 소식지에서 읽었던 축제가 지금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통나무 자르기라는 낯선 모습으로. 자고로 축제 공연은 깜깜한 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진면목을 보이는게 아니겠는가. 나와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슈퍼마켓으로 향하면서, 오늘 저녁에 축제를 보러 와도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다. 밤마실을 확정할 수 없었기에 가볍게 나눈 대화였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랍스터 소동때문이었는지 우리는 축제를 잊고 있었다. 저녁 식사로 살아있는 랍스터 두 마리를 삶는 일이 녹록하지 않았고 우리는 혼이 나갈만큼 큰 소동을 치른 후였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었는지 해질녘 푸르스름해진 항구를 걸어서 결국 프린지페스티벌이 열리는 광장에 도착했다.
해가 진 광장은 한낮과는 사뭇 다르다. 샬럿타운의 한낮과 밤은 전혀 다른 공간을 경험하는 듯하다. 아이가 가리켰던 분홍 불빛은 광장 가장자리에 세워진 넓은 정자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자는 사방이 훤하게 뚫려있었는데, 너비 1미터 정도의 천이 지붕에서 땅바닥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분홍 등으로 칠해진 단색 천들이 무대의 양 옆과 뒤쪽을 에두르고 있다. 무대 아래 쪽에 설치된 조명이 색색의 천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냈다. 보라빛이 섞은 분홍 불빛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빠져나가지 못한 분홍빛은 지붕 안쪽에 모여 있었다. 정자는 아주 멋지고 훌륭한 무대로 변신했다.
네 명의 남자들이 정자 안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각각 첼로와 전자기타, 바이올린, 통기타를 연주했다. 바이올린을 멋지게 켜던 남자가 연주를 멈추고 핑거스냅으로 리듬을 맞추며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세 사람은 연주를 계속하며 화음을 맞춘다. 리드미컬하게 빠른 텐션을 유지하는 음악에 맞춰 나와 아이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광장 잔디밭 곳곳에서 춤추는 사람들이 보였다.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건 젊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남녀 어르신 여섯 명이 두 줄로 서서 춤을 추고 있었다. 포크 댄스를 추듯이 파트너를 바꾸며 춤을 이어갔다. 옆에서는 어린 아이가 덤블링을 하고 있었다. 흥겨움을 표현하는 아이만의 방식이었으리라. 주변 사람들은 아이가 덤블링을 할 때마다 박수를 쳐주었다.
광장 안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했다. 소설 빨강머리앤에서 일리저버스가 꿈꾸었던 '내일'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광장 안 모든 사람들은 일리저버스의 '내일'에 모여 있었다. 덤블링을 하고 있는 아이와 일리저버스는 또래일 것이다. 일리저버스가 이곳 광장의 '내일'에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흥겨움을 표현할까, 궁금해진다. 어떤 모습이든 다정하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사랑어린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에게 '내일'에 속한 사람이 보내는 따스한 공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일리저버스는 어린 시절의 앤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두 사람은 생일도 같다! 앤은 일리저버스가 이야기하는 '내일'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고, 둘은 단짝이 되었다. 앤은 저녁마다 일리저버스에게 우유를 가져다주었는데, 가끔 함께 산책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었다. 어느 으스스한 저녁,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산책을 나갈 수 없던 두 사람은 앤의 방에서 요정의 나라 지도를 그린다. '눈의 마녀'와 야생 벚나무, 그리고 '내일'도 그려 넣었다. 요정의 나라에는 '시간'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봄의 시간, 초승달이 뜨는 시간, 긴 시간, 다음 시간... 저마다의 '시간'을 가리키는 귀엽고 조그만 빨간 화살표가 지도 위 곳곳에 그려졌다.
길버트에게 편지를 쓰던 앤은 이날을 기억하며 이렇게 적었다. "가끔 있는 시간, 즐거운 시간, 빠른 시간, 늦은 시간, 키스 뒤 30분의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태고의 시간, 이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의 하나야."
나에게는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 하는 시간,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중 하나이다. 해질녘 항구를 걸으며 광장에 도착해서 프린지페스티벌을 즐기는 시간 동안, 두 아이와 나는 시공간을 공유하며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아이들과 함께 완전히 존재하는 시간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생각만큼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시간이다. 더구나 오늘은 벨벳같이 진한 하늘과 바다의 야경까지 함께 했다! 오늘은 우리에게 '내일'이었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일'에 머물기를.
앤은 일리저버스의 아버지, 피어스 그레이슨에게 편지를 썼다. 조그만 일리저버스는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되고 드디어 꿈꾸던 '내일'의 나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조그만 아이는 사랑을 느끼고 웃음을 되찾고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어느새 광장 안 정자 무대에서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던 사람의 수가 두 명으로 줄었다. 바이올린과 전자기타를 연주하던 두 사람이다. 한 명은 작은 피리를 불고 다른 한 명은 탭 댄스를 추었다. 두 아이는 현란하게 움직이는 발동작에 감탄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생생한 기쁨의 순간이다. 아이들과 여행을 오면서 밤마실은 포기했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잠자리 시간을 조금 늦추고 야경을 구경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