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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단 Oct 02. 2022

길버트와 앤처럼,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일방통행(One way). 한 쪽 방향으로만 가라는 신호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를 알려주는 편리한 신호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한쪽 방향을 바라봐야하는 불편한 신호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녀가 걷는 길에 일방통행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신호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나란히 걷는 일방통행 길은 든든한 결속력을 느끼게 한다. 반면에 각자 떨어져서 자기 말만 하는 일방통행은 갈래 길이 나타나면 분명 각자의 방향으로 찢어져 걷게 될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후로 나는 말과 행동이 아이들과 나란히 걷을 수 있도록 무척 애를 써왔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엄마의 양 옆에서 살을 맞대고 걷는 걸 좋아한다. 우리는 캐나다 샬럿타운의 일방통행 거리를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양 손에서 느껴지는 큰 아이와 작은 아이의 체온이 무척 사랑스럽다. 






"아이들을 열 명 길러 둘을 잃은 내 '충고'는 적당히 매질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 아이에게는 그 방법이 가장 효과 있을 것 같군요. 저 아이의 성질은 그 머리색깔과 똑같아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머릴러." 앤에게 심한 말을 해서 화나게 한 린드 부인은 오히려 자신이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질'이 아이를 다루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머릴러는 어린 아이를 때리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십대에 들어서면서 소설 빨강머리앤을 함께 읽는 온라인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나와 같은 '엄마'인 참여자들은 소녀때는 몰랐던 머릴러의 매력에 무척 감동했다. 머릴러는 대단히 현명하고 올바르게 앤을 교육했다. 앤의 실수와 잘못을 구별하여 적절히 대응했으며, 앤에게 자만이 아닌 자부심을 가지도록 교육했다. 앤의 상상력이 가진 장단점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강해지도록 이끌었다. 무엇보다 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세상에는 린드 부인처럼 아이를 강압적으로 키우는 부모도 있고, 머릴러처럼 사랑으로 키우는 부모도 있다. 앤과 길버트도 머릴러처럼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신혼집을 방문한 길버트의 고모인 메리 머라이어는 린드 부인같은 사람이었다. 메리 머라이어는 월터에게 식사 예절을 주의시키면서, 소리내어 먹으면 커다랗고 시커먼 악마가 커다랗고 시커먼 자루를 가지고 찾아와 나쁜 아이들을 그 속에 집어넣는다고 겁을 준다. 한국의 망태기 할아버지 이야기가 아니던가. 한국에서도 흔한 그 이야기로 아이들을 겁먹게 하는 행동을 길버트와 앤은 싫어했다. 한번은 젬이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온다며 신나하자, 메리 머라이어 고모는 설마 아직도 산타클로스가 정말로 있다고 믿는 거냐하고 물었다. 앤은 깜짝 놀라고 길버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되도록 오랫동안 조상이 물려준 동화나 꿈을 간직하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고모님."


소설 속에서 앤과 길버트의 양육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다. 빨강머리앤 소설은 육아와 집안을을 주된 주제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앤과 이웃들의 사랑과 결혼, 아이들의 성장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재로 삼는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소동을 지켜보는 앤의 시선에서 엄마로서의 애정이 느껴진다. 그중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대사는 낸의 소동과 관련이 있다. 


앤과 길버트는 쌍둥이 자매를 낳았고 앤과 다이애나라고 이름붙였다. 평상시에는 낸과 다이라고 부른다. 낸은 친구 도비의 거짓말을 믿고 자신이 뒤바뀐 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1주일 동안 낸은 우울하고 기운이 없었다. 가족들은 낸을 걱정했지만 낸은 도비에게 들은 말을 하지 않고, 어느날 밤에 '여섯 손가락 지미'의 집을 찾아간다. 도비는 지미가 술을 마시면 낸과 뒤바뀐 아이인 캐시를 때린다고 말했다. 낸은 자신의 것이 아닌 행복을 캐시에게 돌려주기로 결심한다. 뒷 이야기는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 흘러간다. 거짓말이 밝혀지고 낸은 다시 행복함을 느낀다. 앤은 후회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이때 앤의 대사는 나에게 무척 절절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로 이 아이가 괴로워한고 있는지 내가 알아냈어야만 했는데도, 이번주에는 다른 일로 너무 마음을 뺏겨 몰랐었기 때문이야. 이 아이의 슬픔에 비하면 정말 하찮은 일이었는데. 가엾게도 이 아이가 얼마나 괴로워했겠어." 앤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둘 다 아직 내 것이다. 완전한 내 것이다. 돌봐주고 사랑하며 지켜줘야 하는 아이들이다. 아직 둘 다 모든 애정과 조그만 가슴의 슬픔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앞으로 몇 해는 내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낸과 다이는 서로 다가붙어 잠들었고, 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세상 모든 부모는 앤과 길버트처럼 잠든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어봤을 것이다. 사랑스럽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사랑을 고백하고 '내 것'이 아닌 아이들의 미래를 떠올려 본다. 나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된 두 아이의 잠든 모습을 지금까지도 지켜본다. 아이는 잠든 모습으로도 엄마에게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으으아아이잉~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도 나를 깨우는 한밤중의 목소리이다. 캐나다 샬럿타운에 온 뒤로는 거의 매일 한번씩 들린다. 두 아이 중 누구일까, 오늘은 큰 아이가 자는 방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함께 자고 있던 둘째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일어난다. 큰 아이가 혼자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슬며시 옆에 눕는다. 다행히 한 번의 잠꼬대 이후 아이는 다시 잠을 잘 자고 있다. 


아이들은 낮에 느낀 감정을 자면서 표현한다. 낮에 스트레스를 받은 날 밤에는, 소리를 지르는 잠꼬대를 한다.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소리의 강도도 달라진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육아를 하면서, 잠꼬대로 아이의 낮 동안의 상황을 추측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잠꼬대에 섞인 소리지름을 의식하게 된 것은 어린이집에 보낸 이후부터였다.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초기에 아이는 한밤 중 잠꼬대를 하는 날이 많았다. 특히 아이가 힘든 일을 겪은 사건이 수첩에 적힌 날이면 빼먹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면서는 잠꼬대로 소리 지르는 일이 많이 줄었다. 유아기보다 적극적인 의사표현이 가능했기에 그만큼 상황 대처 능력도 높아진 덕분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가끔은 아이의 뾰족한 목소리가 한밤의 가라앉은 공기를 뚫고 내 귓가에 빠르게 닿는다. 잠자리에 들기 전, 정리정돈을 하라고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은 날은 잠꼬대에 '엄마'라는 단어가 섞여 있다. '나빠', '미워' 등 부정적인 단어가 뒤따른다. 나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옆에 눕는다. 그리고 살며시 아이를 안아주거나 쓰다듬는다. 아이에게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등의 말을 속삭인다. 아이가 잠꼬대로 구체적인 사건의 단서를 열거하는 경우에는 "엄마가 무엇무엇해서 우리 아가 마음 아프게 했구나, 미안해"하고 세밀한 문장으로 속삭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이는 차분해지고 잠꼬대가 멈춘다. 더욱 신기한 일은 다음날 깨어난 아이는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두 아이 모두 예민한 편이다. 다른 점은 둘째 아이는 그대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많지만, 첫째 아이는 종종 속으로 삼킨다는 것이다. 이곳 캐나다 샬럿타운이라는 낯선 공간은 그 자체로도 아이들에게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기분 좋은 행복함을 동반하는 긴장감,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중적인 감정이 아이들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낮 동안 첫째 아이는 동생의 감정을 토닥여준다. 그래서인지 샬럿타운에 온 뒤로 둘째보다 첫째 아이의 잠꼬대가 많아졌다. 다행히 가벼운 수준이라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낮에 충분히 아이의 감정을 돌봐주지 못한 탓인것 같아서 미안하다. 소설 속 앤이 낸의 잠든 모습을 보며 느꼈을 감정과 비슷할 것 같다. 


두 아이가 나란히 잠든 모습을 보면 행복함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가끔은 서로 번갈아가며 잠꼬대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면서 대화라도 하는 냥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번갈아가며 낸다. 같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두 아이를 토닥이느라 나의 양 손이 바빠진다. 어떤 날은 아이 잠꼬대가 미소와 웃음으로 표현된다. 자다가 웃음이라니 괴상할 것 같은가? 실제로는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겠구나 싶어서 나의 입에도 미소가 걸린다. 


첫째 아이가 잠자리 독립을 한 지는 일 년이 채 되지 않는다. 둘째는 아직도 엄마가 없으면 무서워서 잠을 못 이룬다. 좌우 옆구리와 가슴에 두 아이의 부드러운 몸이 닿는 느낌은 사랑스럽다. 이제는 양 손으로 둘째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든다. 팔은 조금 홀가분해졌지만 다리가 바빠졌다. 각자 방에서 자고 있는 따스한 아이들을 보기 위해 걸음의 신세를 져야하기 때문이다. 


여느 엄마가 자식을 이뻐하지 않겠냐만은, 나는 두 아이가 간절하게 사랑스럽다. 절절한 마음이 나만의 일방통행이 되지 않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다. 초음파 사진에서 손가락보다 작던 몸이 이렇게나 커진 모습은 언제봐도 경이롭다. 자는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이쁘다는 말이 있다. 엄마를 쉬게 해주어서 이쁜 이유도 있지만, 실제로도 새근새근 잠든 모습은 정말 사랑스럽다. 아기였을 때도 초등학생이 된 지금도 나는 두 아이의 잠든 모습을 보면 껴안아주고 싶고 뽀뽀하고 싶어진다. 행여 잠을 깨울까싶어 마음으로 보듬는 날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샬럿타운에서 아이의 웃음 잠꼬대를 들을 수 있을까? 오늘은 두 아이 모두 소리지름 잠꼬대 없이 평온하게 잘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신나게 웃고 떠드는 두 아이를 지켜본다. 작은 아이는 계속 웃고 신나하는 걸 보니 오늘밤 무난하게 지나갈 듯 싶다. 큰 아이는 놀면서도 양팔을 접었다가 내리는 긴장 동작을 반복한다. 동생과 저리 신나게 놀면서 긴장 동작이라니, 아직 이곳이 익숙하지 않은 탓이겠지. 왠지 오늘은 첫째 아이의 잠꼬대가 들릴 것 같다. 아이가 잠결에 보내는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면 귀를 쫑끗하고 잠이 들어야겠다. 





한밤 중에 깨어나는 일은 한편으로는 피곤하기도 하다. 하지만 엄마의 토닥거림에 부드러워져서 다시 잠이 드는 아이들을 보면 피곤함이 사라진다. 중요한 일을 해낸 것 같이 뿌듯하다. 그순간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면 의기양양한 표정에 웃음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잠꼬대는 얕은 수면 상태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이가 깊은 잠에 들때까지 누워있다가 방을 빠져나와야 한다. 


잠잠해진 아이 옆에 누워 아이의 체온과 체취를 느끼는 시간은 따스하고 향기롭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소동이 끝난 뒤 잠든 낸을 바라보던 앤처럼, 완전한 나의 것인 아이를 보며 돌봐주고 사랑하며 지켜야 할 의무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초등학생이 된 이후 점점 품에서 벗어나고 있는 아이여서, 지금 이렇게 품 안에 있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길버트와 앤이 그러했듯이 아이들이 되도록 오랫동안 동화와 꿈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이곳에서 아이는 한국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굳이 교육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낯선 문화에서 살아보는 게 이번 여행의 목표이다. '영어 교육'만을 목표로 고집한다면 아이들은 동의하지 않는 일방통행이 될 것이다. 우리 셋은 나란히 걸으며 '캐나다에서 즐겁게 살아보기'를 향해 걷고 있다. 아이들은 적응력이 뛰어나니 이곳의 낯섬때문에 잠꼬대를 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곧 엄마에게도 깊은 밤,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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