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상 속 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캐나다 샬럿타운 거리에서는 빨강머리앤 관련 기념품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크고 작은 빨강머리앤 인형도 그중 하나이다. 밀짚모자와 양갈래로 땋은 빨강 머리, 그리고 주근깨와 녹색옷은 빨강머리앤의 상징이다. 한국에서도 나는 줄곧 그런 모습의 앤을 상상해왔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만난 앤의 첫인상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다시 한번 빨강머리앤 인형을 세심하게 살펴 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밀짚모자다. 밀알을 떨고 남은 줄기인 밀짚으로 만든 모자는 황갈색과 흰색, 그리고 그 사이쯤 되는 다양한 갈색을 띄고 있다. 격자 무늬로 땋은 모양의 동그란 챙은 아이의 얼굴보다 훨씬 넓다. 한국에서 농사일을 할 때 사용하는 밀짚모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녹색 끈으로 테를 둘러서인지 여행용 모자처럼 발랄하다.
밀짚모자 바로 아래쪽으로 빨강 앞머리가 살짝 내려와 있다. 귀 뒤쪽으로는 머리카락을 굵게 땋아서 양갈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브라이트 리버 기차역에서 매슈가 앤을 처음 만났을 때, 앤의 양갈래 머리는 등 아래까지 내려왔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양 볼 가득하고 눈이 크다. 검은 눈동자 주변이 녹색으로 덧칠해져 있다. 소설 속 앤의 눈동자는 그때 그때의 빛이나 기분에 따라 초록색 또는 회색으로 보인다.
앤의 옷차림으로 눈길을 옮겨 보자. 꽃무늬 블라우스와 민소매 진녹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어떤 인형은 흰 블라우스와 무늬가 있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인형은 초록색 긴소매 원피스를 입고 위에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옷차림에 있어서는 인형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이었지만 발목까지 내려오는 초록색 치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상상 속 앤은 갈색 퍼프 소매 드레스를 입고 있다. 수줍은 매슈가 앤을 위해 린다 부인에게 부탁해서 만든 퍼프 소매 드레스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또다른 날 앤은 하얀색 오건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이트샌즈 호텔에서 시를 암송하던 앤을 우아하게 돋보이게 해준 옷이다. 퀸즈아카데미로 떠나는 앤에게 머랄러가 만들어준 연녹색 이브닝 드레스도 아름다웠지만, 나의 앤은 갈색과 흰색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
나의 앤에게는 짧은 앞머리가 없었다. 앤은 머리를 모두 올려 하나로 묶었을 때 우아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큰 눈과 주근깨는 인형 앤과 비슷하지만, 머리색은 그보다 빨갛다. 캐나다 빨강머리앤 인형의 머리 색상은 빨강보다는 갈색에 가깝지 않은가. 나의 앤은 진한 빨강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염색을 한 것처럼.
한국에서 빨강머리앤은 소설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나 역시 애니메이션을 먼저 보고 나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상상하던 앤은 일본 애니메이션 속 앤을 닮았다.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정확히 구별이 되지 않는 얼굴, 머리카락은 염색한 것처럼 새빨갛다. 만화 속에서는 빨강색이든 파랑색이든, 어떤 색상의 머리카락을 갖고 있더라도 한국어로 말을 하면 한국인같이 느껴진다. 나의 상상 속 앤은 적어도 동양인이었고, 서양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앤~"
동양인에게 흔치 않은 외모를 표현한 노래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도 나의 상상 속 친구는 무척 '친근한' 외모, 전혀 이국적이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캐나다 앤 인형들이 지금까지 내가 상상한 앤은 가짜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해졌다.동시에 내 안의 앤이 마음 속에서 자꾸만 쿵쾅댔다.
에이번리 마을의 초록지붕집에 온 고아 앤 셜리는 노바 스코샤의 고아원 출신이다. 노바 스코샤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아래쪽에 실재하는 섬으로, 뉴 스코틀랜드라는 의미이다. 빨강머리와 주근깨는 스코틀랜드계 사람의 특징을 보여준다. 앤 셜리뿐만 아니라 머릴러와 매튜 역시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이다. 매튜는 어머니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하면서 가져온 장미꽃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캐나다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니 앤 인형을 찍은 사진이 한 장도 보이지 않는다. 여러 상점 안 이곳 저곳을 찍으면서도 인형들이 놓인 선반은 모두 건너뛰었나보다. 불편한 마음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을 멈추게 했으리라. 다만 아주 작은 인형 하나가 아이의 방에 놓여 있다. 첫째 아이방으로 가 앤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 본다. 나의 마음 속 앤이 캐나다 앤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 여기 한국이 마음에 드니?
샬럿타운에서 캐나다 앤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는 동안, 오히려 나의 상상 속 앤은 그 모습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캐나다 앤보다 더 마른 몸매와 주근깨가 서너개 있는 노란 빛이 도는 얼굴, 앞머리 없이 양갈래로 굵게 땋아 내린 진한 빨강색 머리카락, 세련된 퍼프 소매로 장식한 아름다운 갈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나의 앤. 캐나다 앤 인형을 보며 불편했던 마음이 미안할 정도로, 나의 앤은 당당하고 쾌활했다. 그리고 한 달동안 그녀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샬럿타운과 캐번디쉬를 함께 여행했다.
하나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다채로운 색으로 분산된다. 하나의 소설도 독자의 상상력을 통과하면 여러가지 모습으로 그려진다. 나의 앤은 누군가의 앤보다 조금 더 말랐을 것이다. 나의 앤은 누군가의 앤보다 조금 더 수줍을 수도 있고, 반대로 활발할 수도 있다. 서머사이드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의 앤은 누군가의 앤보다 더 엄격했을 것 같다.
같은 소설도 행간을 어떤 상상으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작품이 된다. 크리스마스 날 에번리 학생들은 발표회를 열었다. 앤은 매튜가 선물한 갈색 퍼프 소매 드레스를 입고 얇은 핑크빛 종이로 만든 꽃장식을 머리에 꽂았다. 장미가 한 송이 무대 위에 떨어지고 길버트가 그것을 주워 가슴주머니에 꽂는다. 소설 속 문장은 앤이 화를 내고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데 그친다. 소설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나의 상상속 앤은 정반대의 감정이 불쑥 느껴져 재빨리 그것을 떨쳐버린다. 앤이 길버트를 증오하거나 친구로만 생각하는 문장들 사이에서 그를 향한 사랑이 조금씩 싹트고 있었을 것이다.
"내 마음 속에는 여러 종류의 앤이 있나봐. 내가 온갖 말썽을 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어. 내 마음 속에 앤이 하나만 있다면 틀림없이 편안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만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앤이 다이애너에게 한 말)
루시 모드 몽고메리 작가의 'Anne of Green Gables(빨강머리앤)' 은 전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소설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려진 앤의 모습은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종류일 것이다. 하나의 앤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만의 앤을 가질 수 있으니 더욱 소중하다. 역사가처럼 소설의 내용을 고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모습이든 마음 속에 자리잡은 앤의 모습을 사랑하고 싶다. 아무튼, 모두가 빨강머리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