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마리에 정리수납에 관한 넷플릭스 시리즈를 모두 보았다. 정리 수납을 하면서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육아 때문에 정신없는 가족부터 사별한 배우자의 물건을 정리해야 다음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시니어까지 정리 수납이 단순히 물건 정리가 아니라 인생 정리라는 깨우침을 준다.
넷플릭스를 그렇게 보았지만, 심지어 넷플릭스를 켜놓고 정리를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다. 이래서 전문가를 부르나 보다. 나의 경우 물건을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추억 때문이다. 미련 때문이다.
물건마다 추억과 의미를 부여하는 나에게는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물건이 많다. 1996년 첫 미국 여행 때 선물 받았던 음료수 용기도 가지고 있다. 버클리 대학 선배가 후배들이 미국 여행 왔다며 사 주었다. 맨 꼭대기 층에서 만났는데, 층 전체가 천천히 한 바퀴 움직이는 곳으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선배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이야기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창 공부할 때라 음료수 용기를 보면서 다음에 꼭 다시 공부하러 와야지 결심했었는데..... 몇 번의 이사를 거치다 보니 모서리가 깨졌다. 버릴 만도 한데 무슨 미련인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이젠 안다. 가족들은 모르는 나만의 추억이다. 이제 기억나지 않는 추억으로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신박한 정리의 신애라는 사진 찍어 보관하고 다 버린다는데 나도 사진 한 방 찍고 끝낼까?
그래도 우리 집에 가장 많은 비중은 잡동사니 장식품도 옷도 아니고 책이다. 책이 없는 방은 고등학생인 딸아이 방뿐이다. 날더러 책 정리를 하라면서 남편 역시 정작 자신의 책은 정리하지 못한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 물건도 아직 정리 전이다. 과거 영어 수업을 하면서 만들었던 교구와 교재도 아직 남아있다. 지금을 기준으로 현재 쓰지 않으면 모두 정리하라는데, 영어 교구를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 번 버리고 나면 다시 지금처럼 만들 수 없어서이다. 또 당장이라도 영어 수업을 하면 요긴하게 쓸 수 있어서이다. 그럼에도 왜 당장 영어를 가르치러 나가지 않는 걸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더 이상 아이들 앞에서 재롱을 떨고 싶지 않고, 아이들도 나처럼 나이 든 선생님을 반기지 않을 것만 같다.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 깨닫고 싶다면 일단 박스에 넣어 보이지 않는 곳에 두란다. 몇 달이 지나도 박스 없이 잘 살았다면 물건에 사망 선언을 하고 정리하라고 한다. 다락 구석구석에 있는 물건이 모두 그 대상이다. 보지 않는 TV와 비디오 플레이어도 시대가 훌쩍 지나 이제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dvd나 cd 플레이어가 미련인 것은 몇 안 되는 아이템 때문이다. 그걸 언젠가는 다시 보겠다고 여전히 한 잡동사니를 그대로 두고 있다.
나의 마음은 무엇을 따라가는 것일까. 정리가 정말 내 인생을 정리하게 해 줄까?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은 별로 없다. 여행을 떠날 때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는 연습은 많이 해봤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집착이 늘어난 듯싶다. 싱글이었을 때는 이사를 여러 번 해야 해서 나름 정리를 할 수 있었지만,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이사 주기가 길어졌다. 아니, 부동산에 대한 투자 관념이 없어서 그런지 한 집에 7년 8년 참 오래도 눌러살았다. 집안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물건이 많다. 정리만 하면서 살 수는 없어 그대로 두었더니 또다시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났다. 50이 다 되어가는 대도 20대 싱글처럼 집안일은 가만 두고 바깥으로만 다녔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한 것 같은데도 왜 그렇게 속에 쌓인 불만이 많은 건지. 꼬장꼬장 쌓여있는 건 내 불만인 듯싶다. 인생에 대한 푸념인 듯싶다. 이 참에 집안 정리를 하면서 내 인생까지 정리 한 번 해 볼까. 정리라는 게 진짜 내 인생을 정리하게 해 준다면 말이다.
가장 쉬운 정리 방법은 내 삶을 시한부 인생으로 상상하는 거란다. 1년밖에 살지 못한다면? 6개월만 산다면? 그래도 필요한 것은? 시한부 인생으로 상상해도 정리가 안 되는 건? 그냥 받아들이자.
곧 죽을지 모른다고 아무리 상상해도 그렇게 안되더니, 정말 죽으면 어떡하지? 괜한 걱정이다.
“여보, 혹시 내가 죽으면 물건은 그냥 업체 불러서 싹 치워.”
농담을 하면서도 불안을 떨쳐내진 못한다. 백신 날짜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도 못하고 죽으면 안 되는데... 백신 사고로 죽은 젊은 사람 얘기를 들으면 무섭다. 그래서 오늘도 백신 신청을 못하고 주저한다. 정리는 하고 죽어야 하는데... 정리를 해야 안심하고 코로나 백신 주사를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다행이다. 물건 정리는 못 했어도 우리가 부부로서 정리해야 할 불편한 건 없다. 크게 사과할 사건도, 죽기 전에 털어놓아야 할 엄청난 비밀도 없이 우리는 잘 살았다.
참 이상하다. 내 것이 아니면 남의 것은 아주 쉽게 미련 없이 정리가 된다. 단적인 예로 친정 엄마 집에 가면 버려야 할 물건이 확실하게 보인다. 내 눈에는 아무 쓸모가 없어 모두 버리고 싶은데 엄마는 그럴 수 없단다. 엄마의 집착에서 찬찬히 나를 본다. 내가 집착해 정리하지 못하는 물건이 어쩌면 타인의 눈에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 타인의 물건에는 내 삶이 없고 내 경험이 없으니 현재 기준에서 필요와 불필요를 쉽게 따져 정리하기 쉽다. 정리수납 전문가가 의뢰인의 집안 살림을 척척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제삼자가 되어서이다. 어찌 됐든 누군가에게 의뢰하지 않고 내가 집안 살림을 정리하려면 물건 정리에 앞서 추억 정리, 인생 정리가 먼저인 듯싶다. 지나간 내 과거에 먼저 부딪쳐야 한다. 꿈꾸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고통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나를 떠나보내야 하는 도전을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