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대학원에서 노인학 개론 수업을 들을 때였다.
“부모님의 자서전을 써보는 것이 이번 과제입니다.”
하늘이 두쪽 나도 공부라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처음으로 당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글을 썼다.
“내가 글을 써야 니가 학점을 받는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눈물로 내 인생을 쓴다.”
결혼하고 이사를 하면서 컴퓨터와 이메일은 몇 차례 변경되었고 글은 모두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자서전은 어렵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엄마의 인생을 정리한 짧은 기록이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할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 기가 그립지만, 녹음이나 짤막한 일기 같은 기록물이 아무것도 없어 아쉬울 때가 많았는데, 엄마는 아직 살아계시니 그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2022년 봄, 엄마가 치매진단을 받자 마음은 급해졌다. 엄마가 그림을 그리고 짧은 글을 쓰면 동화처럼 뭐라도 엮어보고 싶었지만, 작업은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는 2022년 가을 두서없이 짧은 글을 썼다. 가슴 아팠던 인생, 마을에서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비극을 재치 있게 쓸 재주가 없을 때 용기가 필요하다.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이 생각나고, 지우고 싶은 기억인데 글로 옮기다니 엄청난 도전이다. 회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들춰내며 어떤 곳에선 분노가 치밀어 며칠 동안 잠이 안 오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엄마는 그런 시간을 견뎌내고 글을 썼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 다. 감정에 푹 빠져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았다. 2023년 봄,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자 영영 기회를 놓칠까 두려웠다.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글을 정리했다. 노트북과 데스크톱, 핸드폰을 뒤져 사라진 옛 기록의 조각을 모았다. 한 무명인의 삶을 일부만 기록했지만, 자전적 소설 형식을 취해 썼던 엄마 이야기는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할 시간을 만들었다. 글을 읽는 가족들도 비슷한 시간을 거쳤다.
“좋은 기억이 없어. 대화다운 대화가 없었다고.”
그랬던 걸 뛰어넘어 마음을 조금은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미안허다. 아들아.”
엄마가 그런 얘기를 했다.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큰 애 성격이 나빠진 건 내 잘못이 커. 큰 애가 둘째를 때려서 내가 홧김에 영환이 등짝을 사정없이 주먹질을 했드만 코피를 쏟았어. 그 후부터 사납게 대들더라. 내가 참말 두고두고 잘못혔다고 이날까지 후회했다.”
동생 차 타고 집에 가는 데 큰오빠가 전화했단다.
“병원에 있으라고 했더니 퇴원한다고, 나이 먹어 갖고 자식들 말 안 듣고 고생시키는고만 그려. ‘늙으면 개 된 다’고 나보고 그랬는디 그 말 허는 건 나도 니기다 잘못해서 그려. 니기다 잘못한 건 나도 항상 알고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했지. 니 오빠가 아이고, 어머니! 그것은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허시오. 그러더라. 나 센터 다닐랑게 돈이나 대줘. 그릿드만 예, 이제 센터 가는 돈은 다 대줄게요. 어머니, 잊어버리시오! 제가 잘못했은 게 잊어버리시오! 그러드만.”
“참기름 보내줄 테니까 택배 받아라.” 만 하던 엄마가 큰오빠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화해 없이 인생을 끝내고 뒤늦게 가슴 치지 않아도 된다.
“정읍 농촌에서 4년제 대학교를 네 명이나 보낸 집이 얼마나 되겠나 찍어봐. 몇 집 나오지도 않아. 그만큼 가르쳤으면 그 후부터는 자식의 문제지, 당신들이 더 보태 주고 희생할 거 아니라고. 아버지랑 남자 대 남자로, 소래 포구 같은 바닷가에서 술 한 잔 마시면서, 그간 고생 많이 하셨다고 말하는 게 내 바람이었지. 근데 그게 안 되더라고.”
인생에서 바라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큰오빠가 처음으로 그런 얘기를 했다. 주식 이야기와 관리사무소 직원 과 얽힌 아파트 주민만 말하던 오빠가 오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지. 아버지 올라오시면 한 번 가 서 술 한잔해. 그럼 되지.”
“맞어. 그래야겠다. 다음에 아버지 오시면 모시고 가야겠다. 회 떠서 술 한 잔 꼭 해야겠다.”
“외갓집에서 살 때 좋았던 거 없어?”
“외할머니랑 엄마랑 거의 똑같았다. 너무 가난해서 육 성회비 안 주는 거야. 그거 못 내서 교실에서 의자 들고 벌서 봐라. 진짜 짜증 난다.”
“오빠 때도 그렇게 가난했어?”
“야, 그때도 무지하게 가난했지. 남편 죽고 혼자서 자식 키우는 외할머니한테 외삼촌이 어떤 존재일까, 그런 생각을 가끔 했다. 외할머니한테 삥땅 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외삼촌이 대수 초등학교에서 영원초등학교로 전학 갈 때 자전거에 태워 데려다주신 거 기억난다. 또 내가 초등 3학년 때 표준 전과 풀이를 했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거든. 외삼촌이 표준 전과에 내가 푼 걸 우편으로 보내셨어. 진짜 내가 당첨되어서 선물인가 돈인가 받았던 거 생각난다. 촌놈도 하면 되는구나, 세상이 공평하구나, 그런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좋았던 일을 회상했다. 엄마랑 좋았던 이야기 말이다.
“택배 받았냐?”
그 상투적인 안부가 10년이 쌓이니 서로를 알아가는 가슴 뭉클한 에피소드가 되었다. 먹거리 택배 상자 속에 꼭꼭 숨어있던 시골 시부모의 사랑이 어느 날 보였다. 그때의 감동을 카톡에 담았다며 가족과 공유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얻고 싶었던 이해, 공감, 사랑, 격려와 지지 같은 소중한 가치를 되돌아본다. 결핍되었던 모든 것을 채울 수 없겠지만, 적어도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인생을 돌아볼 용기가 있고 지나간 일을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을 넘어 이제 뭔가 좋은 걸 시도할 수 있다.
어머니, 이 책이 마지막 선물이 아니길 기도합니다. 남아있는 시간을 알 수 없지만 지금부터 동화처럼, 행복한 하루를 위한 오늘만큼의 기도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