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신과약 만만세
나는 유행병 환자다. 내가 걸린 병은 현대인의 정신장애랄까. 삶의 언젠가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친구처럼 함께한 중증의 우울과, 어딘가 부족하다는 자괴감으로 항상 스스로를 탓하게 하는 ADHD,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예민한 건지 스스로를 알 수 없어 괴롭던 시간.
다른 사람들도 나랑 똑같은 줄, 인생은 이렇게 고단한 것이라는 흔한 말을 그대로 믿고 살다 우연히 내가 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너, 감정 없는 로보트 같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아마 그냥 귓가를 스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하던 한 사람이- 그는 그것을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를 여전히 알 수 없다 - 나에게 닿으려 애써 준 숨이 내 귀를 간질였고, 그 결이 마음을 두드렸다. 빼꼼 문을 열어 호기심 가득한 눈알을 굴리던 그때가 바로 어제 같기도 하고 십 년 전 추억 같기도 하다.
나는 통계를 믿지 않는다. 도대체 안전한 정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침을 먹는 아이들이 성적이 좋다는 조사가 아침 식사의 중요성을 변증하는 자료로 사용된 것을 보고, 수긍할 수 없었다. 아마도 아침 식사를 하는 아이는 수면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그 가정의 주부는 자녀 양육에 신경을 쓰는 영향일 뿐인 건 아닐까. 그래서 설문 조사 결과라는 건 도통 안심이 아니다. 도대체 로스카츠처럼 씹히지 않는 결론이다.
학창 시절에 뉴스에서 보았던 조사 하나가 남아있다. 중고생 중 15퍼센트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결과를 굉장히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한 앵커의 눈빛이 이채롭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 결과를 보고 놀랐지만, 그의 놀람의 포인트가 내 것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학생이 고작 15퍼센트 라는데 당황한 나와 달리, 앵커는 너무 높은 수치에 충격을 받았다는 식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리고 최근까지 - 매일 매 순간 죽고 싶었다. 15라는 약소한 숫자와 앵커의 눈빛은 나를 더 가두는 무엇이었다.
내 기억이 남아있는 모든 순간, 나는 그랬다. 학업도 교우 관계도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아마도 내가 처한 환경이 그랬나 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마음에 품고 사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것. 꽤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몰라서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그 뉴스를 보았을 때,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인가 손끝 거스러미처럼 불편한 기분을 눌러버렸다. 나는 늘 손가락 끝단에 문제가 있었으니까.
이런 거칠고 험한 말을 하는 것은 이전의 나 같은 누군가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싶어서다. 죽고 싶은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아픈 거라고. 나를 고쳐줄 수 있을 것 같은 정신과를 찾는 데도 너무 긴 시간이 들었고,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끊지 않고 약을 먹은 것은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죽고 싶은 누군가가 내 말을 듣고 견디고 버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당신은 아프다고, 도움을 청하라고, 내가 안다고 속삭일 수도 있고, 큰 소리로 외칠 수도 있다.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
나는 이제 죽고 싶지는 않다. 기분이 쑥 꺼질 때 내 기분과 분리하는 능력도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누군지 모를 당신에게 하고 싶다. 한 사람이라도 듣고 약을 먹을 수 있다면 나는 좀 광대가 되어도 좋다.
나를 고쳐서 세상에 맞추려던 시간을 넘어, 이제는 ‘나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