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어린양 총량의 법칙

3부 2장 어린양 총량의 법칙

by 투명물고기


어린양 총량의 법칙



병 뒤에 숨는 사람을 싫어한다.

자신의 상처를 자랑하듯 늘어놓는 이들이 불편하다.

누구의 삶도 쉬운 게 아닌데, 왜 유독 자신만 특별한 고통을 겪었다는 듯 말하는 걸까.

그 말끝마다 숨어 있는 냉소와 자기 연민이 견딜 수 없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냉철한 척, 산뜻한 사람인 척 살았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나의 유약함.

다른 이보다 약해서 부끄러워했고, 그래서 더 단단한 척 굳어버렸다.

내 병명은 우울, 경계, 주의력 결핍 같은 말들로 설명될지도 모르지만,

사실 내 병은 이름이 아니라 **“참아내는 것”**이었다.

버티고 견디는 게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린양 한다.”

사전에 없는 말이다.

경상도 어디쯤에서나 쓰였을 것이다.

경상도 아지매였던 우리 할머니가 내게 늘 쓰던 말이니까. 아마도.

늘 퉁박을 섞어 말씀하셨다.

“아이구, 엉덩이는 조선 반만 한 것이 또 어른양허냐—”


그 말에는 한결같이 비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린양 한다’는 것은 철없고 미련한 행동을 뜻했다.

일찍부터 그렇게 배웠다.

울면 안 되고, 떼쓰면 안 되고, 도움을 청하면 안 된다는 걸.

그건 어엿하지 못한 일이라고.


나는 그 단어를 오래도록 미워한 것 같다.

왜 미워했는지 이제 알게 되었다.

그 단어가 내게서 빼앗은 건, 약하여 보호받을 권리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권리를 되찾고 싶다.




나는 돌봄이 없는 유년을 살았다.

고난을 무기처럼 들고 사는 사람들을 경계했고,

내 마음이 피투성이란 걸 알아채는 이가 없었다.

“힘들지?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따뜻한 건넴은 본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마음속 어딘가엔 늘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울음은 숨겨야 할 부끄러움이라서

나는 언제나 그것을 없애려 애썼다.


나는 온돌 같은 너의 따스함으로 그 아이를 품고 울었다.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피처럼 솟아오르는 울음.

목구멍이 꺽꺽 막히고, 손끝이 저리도록, 짐승처럼 울었다.




호명이 말했다.

“준희야, 이건 퇴행이 아니야. 복원이야.

너는 버려진 아이를 다시 데려오는 중이야.

네 안의 시간들을 수거해서, 네 품으로 돌려주는 중이야.”


그 말이 나를 붙잡고 일으키자,

대문간에 앉아 떨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였다는 걸 알아챈 것이

너무 늦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젖어든다.




나는 거짓말에 능하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어야 했으니까.

모든 욕망엔 근거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진심을 포장했고, 그 포장이 점점 나 자신이 되었다.

설득과 논리로 스스로를 위로했고, 그게 생존법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 뒤엔 단 하나의 진실만 있었다.

“사랑받고 싶다.”


호명은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말은 미숙함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기도야.”


그 말을 통해 수치로 가려야 했던 눈물이

황홀한 빛깔을 띠게 되었다.

그토록 단순한 문장이, 절대자의 언어처럼 울렸다.




이제 나는 다시 빚어진다.

다시 지어지려면 완전히 가루가 되어야 하니까,

그래서 부서진 거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랑받는 일은 증명을 통해 얻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게 주어지는 거라고 마음이 울린다.


나는 스스로에게 담요를 덮어준다.

내 안의 어린양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 아이가 칼을 들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민다.

괜찮다고, 그래도 나는 이만큼 자라서

너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어른이 된다는 건 상처를 숨기는 게 아니라,

상처를 바라보고 돌보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편이 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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