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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 윤 Sep 12. 2024

지문을 다시 입력하세요.

헬스장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날이 조금은 선선해졌다. 여름 내내 진이 빠졌던 몸을 일으켜

조금이라도 움직여보려고 한다. 그래봐야 대단한 액션은 아니고,

집 앞에 있는 단지 내 헬스장에 가서 걸으려고 한다.

약속도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는 날. 

운동이라도 하면 그나마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보안시스템 작동 중입니다. 지문을 인식하세요."

항상 마주하는 첫 관문이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이게 왜?

나는 습진이 심해서 지문 인식이 잘 안 되는 사람이다.

동사무소에서 기계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도 창구로 가야 하고,

핸드폰 지문인식도 안돼서 전부 얼굴인식으로 바꿔놓았다.



Unsplash의 sincerely media



"실패했습니다. 지문을 다시 입력하세요."

에잉. 역시나 두어 번 입력해도 잘 되지 않는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저 산책하듯 몇 걸음 걷고 싶을 뿐인데, 그것조차 입장부터 실패라니?

뭐라도 다른 출입방법이 있을까 싶어 관리소에 문의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고 다만 손가락을 바꾸어 등록할 수 있다는 답변이었다.



그래도 한낱 희망으로 관리소에 방문하여 지문인식 손가락을 바꾸고,

돌아와서 다시 지문을 인식했다.

"지문을 다시 입력하세요." 

다시 했다.

"지문을 다시 입력하세요."



넌 지치지도 않니? 

차라리 사람이면 인정에 호소하련만, 

기계는 한 시간이라도 버틸 기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손가락을 입김으로 호호 불고,

핸드크림을 조금 짜서 열심히 발라가며 몇 번이고 재시도한다.



"이 놈의 헬스장은 어째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

누가 나오는 길에 들어갈 수도 없고,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만 수상한지 이쪽을 한 번씩 흘끔거린다.

초조함이 짜증으로 변화하려는 그 순간.

달칵. 하고 문이 열린다.



"오!"

내가 지금 운동을 하러 온 건지 지문 인식 평가를 받으러 온 건지 

세게 현타가 온다.

그러나 어떻게 열린 문인데 부랴부랴 들어가고 봐야지.



Unsplash의 bernard hermant



"반갑습니다."

드디어 화면에 찍힌 입장 멘트를 보며 헬스장 안으로 들어선다.

아직은 습하고 꿉꿉하던 바깥 날씨와 다르게,

쾌적하고 시원한 바람이 산뜻하게 나를 맞아준다.

에어컨 맛집인데? 그래 역시 오길 잘했어.

남들은 몇 초면 하는 입장만 겨우 성공한 것인데,

이미 대단한 체력훈련을 한 것 같은 개운함이 느껴진다.



"자자, 운동이다, 운동."

처음에는 가볍게 20분만 걸으려고 했던 마음이,

겨우 들어온 김에 뽕을 뽑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바뀐다.

어렵게 들어왔으니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하는 심리다.

일의 시작에 있어서 작지만 큰 해결과제는,

성취감과 동시에 묘하게 무리하게 되는 부담을 준다.



작지만 큰 해결과제


그래서 다시 운동하러 오기 싫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순간에 집중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헬스장 들어갈 때 지문인식하는 것 같은 활동의 첫 단계는,

작은 출발이지만 그 뒤의 훨씬 더 많은 단계들을 술술 풀어지게 하는 열쇠다.

그러니 어떻게 잘 넘기느냐에 따라서 기분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운전하기 전에 주유를 하고 내비게이션을 설정한다.

중요한 문서를 인쇄하기 전에 프린터 상태를 확인한다.

고기를 구울 때 냉장고에서 미리 꺼내둔다.

음악을 연주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한다.

같은 것이다.



이렇듯, 작은 준비나 해결과제가 본격 과제를 좌우하는 사례들이 일상에 많다.

운동하러 갈 때 운동복을 입고 신발 신고 현관을 여는 순간이

가장 어려운 순간이라는 말도 있다.

아주 작은 시간을 투자하여 시작을 했을 뿐인데도 그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지고,

대신 하고 나면 일의 많은 부분을 해결한 것처럼 수월해지는 이유는 뭘까?



일단 통과하면 속이 시원하다


사실 운동복을 입거나 지문을 인식한다거나 하는 것은,

실제로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는 작은 행동이다.

하지만 그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라 느껴져 심리적으로 큰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일단 몇십 번을 도전해도 몇 분이면 지문인식 성공해 들어갈 수 있지만,

한번 화장실이라도 나갔다가는 또 그 걸 해야 한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질 못한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는 불확실성이나 변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저항을 느낀다.

시작하기 전에는 일어날 일들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애초에 지문 인식만으로도 귀찮아 죽겠는데 몇백 번을 해도 안 열리면 어째?

그러다 보면 해야 할 일을 미루기도 하고 스트레스가 커질 수 있다.

하지만 막상 실행하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든다.



달칵. 해제 성공. 반갑습니다.

겨우겨우 지문을 해제하는 그 순간이 되면,

작은 행동이 의지를 강화하는 신호를 뇌에 준다.

작은 성공만으로도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보상 호르몬이 분비되어

자연스럽게 나아갈 동기를 얻고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일의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 자체로 추진력을 얻는다.

첫 단계를 잘 넘겼을 때 동력이 그 이후의 단계서도 지속되어,

더 향상된 에너지를 가지고 몰입할 수 있다.

헬스장에 입장하는 작은 행동은 건강이나 활력 같은 장기적인 목표로 이어지는데,

시작을 해야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는 만족감과 실행의지가 생겨 난다.



Unsplash의 birk enwald



"뭣이?"

조금은 무리하게 운동을 마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헬스장 건물 앞에 붙은 벽보를 보고 당황했다.

건물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건물 자체에도 지문 인식기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통과해야 할 문이 2개가 되었다.

지문인식기 하나당 평균 2,30번이 소요되는데, 2개라고 하면...



"에라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까지 못 들어간 적은 없었잖아?"

불쑥 짜증이 났지만,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몇 번 더 찍더라도 결국엔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나갈 때는 외출 버튼만 누르면 바로 문이 열린다.

오늘 하루도 어쨌든 작은 성공을 했다는 생각에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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