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계절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당장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더워서 축축 늘어졌는데,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가 교차하는 10월이 되었다.
자연이 흐름이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부드럽게 전환되는 달.
나는 흐리고 맑은지. 덥거나 추운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느낀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9월까지 내내 날씨가 모든 것을 얼마나 지치게 만드는지 체험했다.
기본적으로 끓는 더위가 모든 에너지를 고갈시켰고,
거기에 습기가 더해져 몸이 완전히 느려졌다.
간단한 일도 점점 어려워지고 나 자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공기가 너무 두껍고 끈적해서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도 지쳐버렸다. 흐리고 습한 날은 나른하고 짜증이 일었다.
그 뒤로 폭염이 이어지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짜증은 기본이고,
끊임없이 불편한 상태로 집중력과 인내심이 떨어졌다.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거나 의욕을 갖기가 어려워졌다.
내 기분이 일기예보와 직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묘하게 좌절스러웠다.
그런데도 당연히 미룰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찬 날들이었다.
시간별로 날짜별로 반드시 해야하는 것들이 쌓여있는 일상이었지만,
모든 것이 10배는 더 힘들었다.
습도로 인해 은근히 열감을 항상 머금고 있는 몸으로,
머리도 물에 잠긴듯 몽롱한 정신으로 하루하루 기어나갔다.
그렇게 영겁의 세월을 기다린 것 같은 기분으로 10월이 되었다.
이쯤되면 날이 좋다는 게 어떤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침이 되자 어깨에 가득 짐을 들고 언제나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양 손에 아이들 손을 잡고 멍하니 아파트 밖으로 걷는데 어라? 뭔가가 달라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몇 달만의 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을 모두 등원시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역시나 시원한 바람에 집 안 공기가 환기되었다.
인터넷으로 날씨를 검색하니 20도도 안되는 온도였다.
이제 진짜 가을이구나!
달력에 적힌 날짜를 감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감이 났다.
당장 청소에 돌입하자.
간이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부엌으로 가서 심호흡하고 구석구석 찌든때를 닦는다.
식세기에서 접시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린다.
묘하게 활력을 느끼며 냉장고 선반을 정리한다.
동시에 빨래통에 있던 빨래들을 탈탈털어 세탁기 시작 버튼을 누른다.
다음으로는 빨래를 맡는다.
실외기가 돌아가는 다용도실은 항상 숨이 턱턱 막혔는데 이제는 선선하다.
지금껏 미뤘던 얇은 이불 빨래도 전부 함께 돌린다.
시트 몇 장을 높이 달린 베란다 빨래대에 걸자 깨끗하고 따뜻한 기운이 스민다.
빨래도 잘 마르고 보송해질 것 같다.
문 열고 청소기 돌리는 것도 상쾌하다.
눈에 보이는 바닥 먼지는 모두 빨아들일 기세로 매트를 들어서 아래까지 청소한다.
초록 식물들에 물을 주기 위해 빨래가 걸린 베란다로 다시 나간다.
시원한 호스에서 화분까지 물이 퍼져나가고,
나뭇잎들은 물방울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생기를 얻은 듯 보인다.
대체로 깔끔해졌으니, 아직 구석구석 남아있을지 모르는 먼지는 좀 미뤄둘까?
잠시 휴식을 위해 커피가루를 뜨거운 물에 부으며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저녁은 뭘 먹지? 일단 당장 먹을 점심과 밑반찬부터 만들어야겠다.
호로록. 주방 식탁에 앉아 바깥 창문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10월 한정 에디션같은 날씨다. 좀처럼 없는 맑은 기분.
물론 날씨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되면 더 좋겠지만.
가을에 태어난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을 여자인건가 싶다.
실제로 인생도 가을부터 시작했으니.
1년의 주기가 그렇게 맞춰진 것처럼,
여름동안 겨울잠을 자듯 생존 모드에 돌입했다가 가을에 생기를 찾는다.
버티고 버티면서 조금씩 하향 곡선을 그리던 생체리듬을,
날이 좋을 때 바짝 끌어올려야 한다.
좀 더 의무적인 마음으로 미뤄뒀던 일정들을 하나씩 해결하고,
어떻게 하면 1년 중에 짧디 짧은 이 황금시기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지 계획해야 한다.
가을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첫번째.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지.
미용실, 병원, 세탁소, 수선집 같이 밀린 일정들을 효율적으로 소화한다면 좋겠다.
꼭 너무 업무적인 장소 말고도 홀로 눈요기를 하는 것도 좋다.
공원 산책, 5일마다 열리는 장날 구경하기, 혼자 벤치에 앉아 운동하는 아이들 지켜보기 같은.
두번째. 제철 재료로 음식을 해야겠지.
호박고구마를 구워서 아일랜드에 올려두고,
생선을 굽고 채소를 준비한다.
지금껏 더워서 먹지 않고 있던 전골 요리를 한 번 해볼까한다.
그나마 더위에 찌들지 않아서 움직일 수 있을 때 밑반찬도 열심히 만들어 둬야한다.
세번째. 옷정리하고 가을옷 꺼내 입어야지.
여름 내내 티셔츠 한 장에 시원한 바지만 입고 다녀서 편하긴 했는데,
날이 선선해지면서 입는 옷에도 변화가 필요해졌다.
너무 얇은 민소매와 반팔 반바지는 슬슬 정리를 하고,
포근한 재질의 옷들과 재킷 가디건 양말 등을 챙긴다.
주말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킥보드도 열심히 타러 다니고,
놀이 공원에 놀러가서 3,40분씩 줄을 서도 괜찮고,
카페 야외석에 앉아 햇빛이 내리쬐는 바깥풍경을 감상해야지.
가을에 많이 열리는 축제와 행사에 참가하는 것도 좋고,
언젠가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맛있는 저녁 후 맥주를 마시는 날도 오겠지.
자자, 시간이 아까우니 어서 움직이자.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영락없는 집순이인 나는 그냥 창문을 모두 열어두는 것으로 외출 기분을 낸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경치구경 실컷하며 쏘다니는 쪽보다
따뜻한 담요를 덮고 조용히 책을 읽는 쪽이다.
아, 그래서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던가?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일단은 좀 만끽하고 싶다.
이후로 추운 겨울이 온다면 또 봄을 기다리겠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이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도록 너무 빨리 추워지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