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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 윤 Nov 12. 2024

가을 명소. 영남알프스 간월재 억새 평원에서 느낀 점.

10월의 마지막 주말 다녀왔다.

토요일. AM 6:00.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어둡고 고요한 아침.

일단 눈치를 본다. 연달아 몇주를 토요일 아침마다 등산을 다녀왔다.

주로 해발 200m~400m 사이의 동네 산들이었다.

역시 귀찮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자니 찝찝해서 남편을 툭툭 건드려본다.

오늘도 갈 거야, 등산? 어어, 그럼. 일어나야지. 아.. 그렇구만. 어김없이 출발이다.



출발


AM 6:30.

가까운 동네서 이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차타고 이동하며 행선지가 결정되는 편이다.

오늘은 출발전 잠시 검색을 두드리던 남편이 새로운 곳에 가보자고 했다.

계절에 맞춰 지금 가을에 꼭 가야하는 곳으로,

거리가 집에서 좀 먼 대신에 비교적 수월하게 오를 수 있고 엄청난 절경을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AM 7:00.

그렇게 도착한 곳이 영남알프스 복합월컴센터 앞 주차장이었다.

역시 유명한 곳이라 그런가? 어쩐지 주차된 차가 많아 보였다.

헛둘 헛둘. 가볍게 몸을 풀며 차에서 내리는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왠지 선수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프로의 복장을 하고 모여 들고 있었다.

입구로 향하는 곳에 걸린 플랭카드에 '울주 트레일나인피크대회'라고 써있었다.

가볍고 수월하게 산행할 수 있는 곳 맞아?



울주트레일나인피크홈페이지



업체 제공 사진



AM 7:10.

저 분들은 산을 뛰어서 올라가니까 대회인 거고 우리는 걸어가니까 괜찮아.

갸우뚱 하는 나를 남편이 클라이밍 센터 옆 입구로 이끌었다.

참고로 영남알프스는 높이 1000m 이상 되는 7개의 산군(山群)을 의미하는데,

우리는 그 중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간월산(1,069m) 아래

아름다운 억새풀이 10만여평 펼쳐진다는 '간월재'로 향하였다.



등산 시작


입구에서부터 상당히 길게 돌계단이 이어진다.

보통 등산이라고 하면 흙길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는 꽤나 정돈되고 단정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안하게 오를 수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3일전에 독감백신을 맞아서 그런지 어쩐지 시작부터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AM 7:40.

성큼성큼 돌계단과 흙길을 오르는 남편을 보니 살짝 약이 오른다.

중간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트레일러닝 대회시간을 살펴보니 8시 시작인 듯했다.

우리가 출발한지는 좀 되었지만 이렇게 느린 속도로 오르다가는 따라잡힐 것만 같다.

남편이 산을 달리는 대회라고 말했으니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올라 올 것 같은데,

라이온킹의 물소떼처럼 우르르 쫓아오는 행렬에 묻히는 거 아닌지 슬쩍 걱정이 되었다.



AM 7:50.

다행히 아직까지는 앞뒤로 산행하는 인원이 몇 명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앞사람을 따라잡은 적은 없고, 전부 나보다 늦게 출발한 사람들이

내 앞을 역전해가는 것을 여럿 목격했을 뿐이다.

계속 역전만 당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산에서 가장 느리고 둔한 사람인가?



사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걷다가 멈칫하면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도 멈칫한다는 것이다.

"혹시. 앞에 배.. 뱀이 있나요?"

라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건 안되는데. 어쩐지 미안해서 꾸역꾸역 앞으로 걸었다.



AM 8:10.

예상했던 8시로부터 10분이 지났지만, 나름 어느정도 올라왔기에

아직까지 물소떼에게 쫓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이 말했던 여러 운동 중에 등산만의 특별한 장점.

다른 운동은 하다가 힘들면 내려놓을 수 있지만,

등산은 끝이 보일 때까지 계속 멈추지 않고 가야 한다.


"가볍고 수월한 코스라며?"

"응, 완만하잖아. 아무래도 네가 주사를 맞아서 많이 피곤한가보다."

"그런가. 시간이 많이 걸리는 느낌인데."

"야, 우리 스쳐간 분들 지금 내려오신다. 거의 다 왔나봐."

"어? 진짜."


사람들이 스쳐가다보면 대충 옷차림이나 일행등으로 약간씩은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아까 나를 역전했던 사람들 중 한 팀이 다시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뭔가 생각보다 오래걸리는 거 같아 지쳐가던 차에 거의 다왔다는 의욕이 생겼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1/3지점 밖에 안 왔던 상황으로,

우리가 도착거리를 멋대로 착각하게 되버린 이유였다.)



AM 8:20.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뇌를 내려 놓고 앞으로 걷다보면 몸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쯤되니 이미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남편은 진짜 길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저기 능선이 보이네 억새가 보이네 하면서 한걸음이라도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발 밑의 돌을 밟으면 둔탁한 감각이 느껴지고,

적당히 시원한 바람에 땀이 마르고,

가득한 나무 사이로 풀냄새 공기냄새가 나고,

손끝과 발끝에서 계속해서 나뭇가지와 풀이 치이고,

간간히 계곡이나 발아래 경치가 드러날 때면 너무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임도길 시작


AM 8:40.

드디어 트레일러닝 대회 선수들에게 따라잡혔다.

그와 동시에 드디어 산길을 벗어나 포장된 임도길에 도착했다.

그래서 이제는 역전을 당하더라도 미안하거나 공포스럽지 않았다.

임도길은 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길이었다.

실제로 몇몇 차가 옆을 지나 올라갈 때마다 어쩐지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AM 8:50.

산행할 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다.

바로 표지판이다.

표지판이 나의 베이스캠프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목표지점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간월재에 오르는 길에 표지판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나마도 앞으로 3.5KM 남았다는 표시를 그림이 지워져서 1KM로 읽어 혼선을 빚었다.


그래서 한참을 걸었는데 앞으로 1.5KM남았다는 표지판을 또 마주쳤을 때,

마치 지금껏 내가 걸어온 시간과 공간이

우주의 4차원 세계안에서 접혀버려서 날아간 것만 같은 허무에 빠졌다.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거늘 확 접어 말어?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아까도 말했듯 뇌를 내려놓는 것이다.



11개의 꼬부랑길


AM 9:20.

무슨배짱인지 아무런 정보도없이 산행을 시작했다.

간월재까지 가는 임도길에 꼬부랑길이 11개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출발할 엄두를 냈을까?

그나마 대회 날이어서 꼬부랑길에 대한 플래카드로 겨우 진실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11-3 에서 11-4로 넘어가는 길에 내가 먼저 남편에게 "저거 설마 11-11까지 있는 거야?" 라고물었고,

"에잉?설마." 하던 남편은 후에 11-12가나올까봐 너무 불안해했더랬다.

(그래도 둘 다 찾아볼 생각은 안 함)



AM 9:30.

등산을 하다보면 왠지 고수 같은 분들이 여럿 보이는데,

성큼성큼 힘차게 걷는게 아니다.

오히려 사뿐사뿐 수다떨며 혹은 홀로 경치나 보면서 여유있게 걷는 것 같은데,

어느새 초고속으로 저만치 멀어져 있다.

그리고 특유의 여유있는 태도로,

우왕좌왕하는 내게 팁을 던져주거나 친절하게 산에 대한 정보를 건네며 지나가신다.



AM 9:50.

꼬부랑길 11-11.

어느새 11번까지 도착했다.

설마 12번이 있는건 아니지? 헷갈리지않게끔,

다행히 저멀리 펼쳐진 억새평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인 동시에 함께 도달한 사람들의 성취감이 느껴졌다.





억새평원 간월재 도착


아아, 여기가 간월재구나.

챙겨온 라면과 간식을 먹으며 숨을 돌리는 사람들 옆에서 경치를 즐기며 사진을 찍는것도 잠시,

간월재라고 표시된 인증샷용 바위에 적힌 해발 900m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야, 어째 이상하다 했다.

산보다 쉬운게 억새평원이라더니 여기도 이미 만만치 않잖아?


그래도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탁 트인 가을 하늘 아래 억새의 갈색 파도가 바람에 흔들리며 고요한 풍경을 자아냈다.

조용한 풀소리와 상쾌한 공기는 시간이 멈춘 듯 평화로웠다.

더 오래 머물 수 없음에 약간 허무한 마음은 뒤로 하고,

남은 풍경을 눈에 담듯 찬찬히 두리번거리며 하산 길에 올랐다.





하산


AM 10:00.

산행의 가장 즐거운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바로 하산하는 순간이라고 하고 싶다.

보통 멈추지 않고 산을 오르면 1시간 40분이 걸린다고 블로그에 적혀 있었는데 나는 3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그래도 하산만큼은 동등하게 즐거운 느낌이다.

좀 느리긴 했어도 열심히 오른 길을 후회없이 산뜻하게 마무리 짓는 기분이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스스로 기특한 생각도 든다.


그 때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가 아침에 집을 비운 사이 동생들을 봐주고 있는 5학년 큰딸이었다.

엄마, 어디야?

조금 흐뭇한 마음으로 풍경을 감상하며 내려가던 것도 잠시.

혼자 동생들 보느라 쉬지도 못할 딸의 전화에 부랴부랴 마음이 급해진다.



AM 11:00.

아까 내가 남은거리를 착각했던 1/3지점까지 쉬지 않고 내려왔다.

이 긴 거리를 내가 어떻게 올라갔더라? 싶은데,

옆을 지나는 등산객들은 모두 여유로운 표정이라 좀 부끄러웠다.

그 때 옆에서 남고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얼마나 남았어?"

"이제 좀 정상이 보였으면 좋겠는데..."

"거의 다 온 거겠지? 으아. 지친다 지쳐."

"무슨 소리야 바보들아. 이제 출발점이나 마찬가지라고."


좀 전의 내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조금 웃음이 났다.



AM 11:30.

등산 왕초보자인 나에게 길을 묻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뭔가 우리와 비슷한 느낌의 초보로 보이는 부부가 한 쌍 있었다.

그 분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계속 둘러보다가,

마침 지나가던 나를 붙잡고 이렇게 물어보셨다.


"저.."

"예?"

"그게.. 억새를 보려면 많이 남았나요?"


앗, 여기는 출발지점에서 1/10정도 되는 곳인데.

아까의 나처럼 산책하는 기분으로 나왔다가 많이 당황하신 듯 했다.

나도 모르게 정직하게 네에.. 하, 한참 남았는데요.. 하고는 조금 찝찝해졌다.

조금 희망적인 말로 의욕을 불어넣어드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네비게이션 같은 정확도 보다는 허술해도 힘을 주는 응원 쪽이 필요했던 거 아닌지.


그 때 "비케어풀!" 멀리서 외국 프로 선수의 소리가 들렸다.

선수는 과연 이 산행 길을

마치 도로 위 평지의 모습으로 무려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내가 옆으로 바짝 물러서며 생각도 자연스럽게 그쳤다.

빠르게 쿵쿵 멀어지는 발소리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





그래도 한 번 가 본 사람


AM 11:50.

한참 느리긴 했어도 이제 나는 그 곳에 가본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 곳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는 정도로.

나는 매우 느렸지만 결국 목표 지점에 가서 보고 온 사람이니까.

그 곳의 풍경 날씨 기분 등등 나름대로의 경험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떠올리려고 하면,

억새 평원의 아름다운 광경이 기억 끝에서 서서히 떠오를 것이다.


"흥. 바보야. 간월재는 간월산 정상이 아니니까 완전 정복은 아니거든?"


해발 1069m의 간월산 정상을 찍은 게 아니라며 남편이 나의 감동을 막았지만,

그래도 좋다.

가벼운 산책과 같은 거라며 나를 끌고 온 게 얄미웠지만,

지나고보니 짐도 다 들어주고 계속 자극해 준 남편 덕에 겨우 오긴 했다.


"오빠가 에베레스트 셀파였으면 벌써 교체됐어."


나 역시 한마디했지만 의외로 남편은 좋은 헬퍼인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산을 오를 생각도 안했을 것이고, 산에 오르는 과정도 더 힘들테니까.

다음엔 간월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까?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한스푼 남겨두고,

한스푼의 평온한 마음을 가슴에 담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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