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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May 08. 2024

21세기, 20세기의 낭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말장난 

마치 토해내듯 쏟아낸 나의 카타르시스적 글쓰기 습관이 점점 사라진다. 그것은 아무래도 나의 마음을 동(動)하게 하는 것들이 없어서 인 듯하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솔직히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가득한 일상적 바쁨이 있겠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을 틀게 하는 동기(動機/motivation) 부여가 잘 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이 사랑을 부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로맨스 영화에 보이콧하지만, 허락되지 않은 비관습적 관계에 대한 탐닉은 계속한다. 이 역시 사회의 낙인이 두려운 쫄보인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모순이 한 번씩 터질 때가 있다. 윤리적으로 보았을 때 결코 용서받을 수 없으나, 주체할 수 감정들로 인해 매우 난해한 관계에 서로를 옭아매는 그 말도 안 되는 낭만이 어떨 때는 그냥 멋있다고, 그래서 합리화도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낭만의 실종을 지적하곤 한다. 그리고 몇 달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21세기에 살면서 20세기의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 역시 낭만의 실종 그 연장선에서 애틋한 사랑을 꿈꾸기도 하지만, 전 인류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살고 있는 우리 모두 풍요의 덫에 갇혀 사랑보다는 공허함에 허우적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가. 쓸데없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37년 인생 통 틀어서, 정말 별 볼 일 없는 삶이지만, 타인의 시선 혹은 '보여주기'에 그렇게 경도되진 않은 편이다. 그 누구를 좋아할 때도, 남이 나를 좋아하는 것과 상관없이 미련하게 좋아했으니. 어떤 관습적 관계, 즉 연인 혹은 부부로 변화해 나가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상쇄했다. 나의 상상력마저도. 그래서 나는 조용함 속에 나지막한 낭만을 이어가며, 차마 겉으로는 분출하지 못했던 그 모든 감정들을 글로, 토해내듯 나의 감정을 최대한 꼼꼼히 적어갔던 습관을 길러왔던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일방일 때 혹은 그것이 교차할 때 만족감이 다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해져 그 역시 나와 같은 방향으로 대응할 때, 이것을 성취감으로 치부하고 결국, '좋아함'의 행위를 중단함에 이르기도 한다. 나 역시 이러한 습성을 가진 인간의 부류인데, 지금은 그 누구를 좋아할 마음마저도 없다는 것이 사뭇 슬프기까지 하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서, 나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 이를테면 분노, 짜증, 질투, 애탐 등이 일어나지 않음에 평온함을 느끼기야 하지만, 이 평온함을 과연 행복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지, 그 역시 의문이다. 아무런 마음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래서 토해내듯 썼던 글 역시 실종하고 말았다. 나의 글이 너무나 많은 슈가코팅이 되지 말라고, 미사여구, 형용사, 관용사 모두 없어 날 것으로 나의 온전한 마음을 유영화되는 것에 중점을 두었건만, 이 것은 매우 힘든 노력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을 지배하는 각종 혐오로 가득한 뉴스, 내 주위의 인위적 바쁨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통감하고 있는 물가 상승.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낭만이 내 마음속에 설 공간이 줄었다. 그리고, 쉼 없이 특정인, 아니지 그 특정의 순간을 그리워하며 문득문득 남겼던 글과 이미지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어지자 이 모든 좋아함의 감정들이 고단함이 되어버렸다. 고단함은 나에게 피곤함과 패배감을 안겨주었고, 더 이상 이 모든 정신적 고문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결론에 이르니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합의, 글쓰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중구난방의 마음, 아무것도 정리정돈 되지 않은 나의 마음에서 떠 도는 단어들은 서로를 쫓으며 짝을 지어 문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실패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야 말았다. 하지만, 실종된 낭만을 찾아 떠나기가 귀찮고, 이 귀찮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매우 초라하다. 21세기는 낭만의 실종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초라함까지 드러내는 고약한 시대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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