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월의 앤 Mar 30. 2024

일상에서 다시 일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사실

2024년 3월 30일 토요일.

자카르타로 향한 MH725편이 기체결함으로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회항했다.


뙤약볕에 거의 2시간을 걸어서 그런지 비행기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륙직전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한 30여분 출발시각이 지연된 것도 모른 체 잠들었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이미 비행기는 흰 구름 위를 유유자적 날아다녔고, 비행기 양 날개에 번쩍이는 불빛들은 드디어 30일 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리는 신호처럼 보였다.


쿠알라룸푸르가 나에게 보여준 온갖 짜증 가끔은 따뜻함이 내 머릿속을 교차하다 보니 울컥하기도 했다. 그새 다양하고 복잡한 이 도시에 정이 들었나 보다.


이런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적막한 상공을 감쌌다.


"기체결함으로 인해 쿠알라룸푸르로 회항합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행히 비행기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창밖은 그야말로 대환장이었다. 비는 오고, 저 멀리 천둥 번개는 치고, 비행기는 계속 오른쪽으로 돌고. 비행기 멀미를 거의 30년 만에 처음 느낄 정도로 어지러웠다.


무서울 만큼 침착한 승객들과 기장, 그리고 승무원들.

다들 마음속으로는 안전하게 사랑하는 이들을 볼 수 있길 간절히 기도했겠지.

그렇게 40여분, Klia 공항에서 남쪽 50km 떨어진 곳에서 여러 번의 우회전을 통해 쿠알라룸푸르에 다시 돌아왔다.


지난 한 달 동안, 학생비자 발급 절차를 통해 말레이시아의 절차만을 중시하는 행정 고문을 경험했더니 이제 화도 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수긍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가 느낀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인, 화인들, 서남아인들이 절묘하게 섞인 다문화, 다인종, 다종교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일정 선을 지키면서 사는 게 익숙한 도시였다. 다인종이니 당연히 다양한 언어가 도시를 지배했고, 이 거대하지만 신기할 만큼 조용한 도시는 이러한 복잡하고도 표면적으로 평온한데 익숙한 것 만 같았다.


무엇이든 내용보다 절차! 이게 중요한 행정고문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기에 이른다.

말레이시아를 학생신분으로 오는 사전 자격에만 몇 달. 그리고 여권에 받아야 하는 학생비자 스티커 발급에는 오른팔을 시퍼렇게 멍들게 한 잔혹한 피검사가 요구되는 건강검진을 거쳐, 무려 3주간의 시간이 걸린다. 20년 넘게 해외생활하면서 여권 없이 3주를 외국에서 살아보긴 난생처음이다.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피워 학생비자를 받는데 학교와 실랑이를 벌였는데, 이 모든 절차의 화근은 다름 아닌 Education Malaysia Global Service라는 사기업이다. 말레이시아 전역의 대학교는 이 사조직을 통해서만 비자발급이 가능한데, 나름의 일원화를 추구한 것 같지만 굉장히 사용자불친화적인 행정절차를 양산할 뿐이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친절하진 않다. 굉장히 신경질적이고, 말은 최소화한다. 하지만, 허튼소리를 하거나 남을 속이진 않는다. 친절함 보다는 정직함을 우선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 곳곳은 화교가 많은 Petaling street, 인도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Bangsar지역 등 지역마다 분위기가 매우 다르다. 변화보다는 자기가 잘하는 것 또는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래서인지 일률적이라기보다 다양함이 이 도시 전체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매력이자 동력인 듯하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애주가인 필자는 쿠알라룸푸르 전역의 웬만한 바는 다 들러본 거 같다. 포시즌스 호텔에 있는 Bar Trigona는 물론 Bangsar 지역에 있는 Coley, Three and Co, Rakh, Reka 등 인도 문화와 콤부차를 주제로 한 획기적인 바들은 물론 클래식 칵테일에 집중한 Bar Mizukami 등 이곳은 엄청난 바텐더들이 남의 인정을 갈구하기보다, 자신의 색깔을 다양한 칵테일에 녹여내고, 맛을 아는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독창성(originality)을 추구한다. 그래서 감히 순서 따위를 매길 수 없다. 줄 세우기란 그 얼마나 천박한 짓인가.


매일 밤 한국과 일본기업이 경쟁하듯 지었다는 페트로나스 타워의 불빛을 보며 하루를 마감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빛이 마치 나의 기다림을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아서 좋았다.


부낏 빈탕 뒷 지역의 부낏 실론에서는 아직도 공사 중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현장의 불빛을 보며 이 도시는 끊임없이 자체 속도와 방식으로 '누구도 소외시키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한 발전방식을 택한 것만 같다. 굉장히 복잡하지만 신기하리만큼 고요한 이 도시에는 뭔가 찌든 느낌의 사람들도 있고, 저 멀리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 도시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많은 노동자들의 애환 그리고 이러한 모든 틈바구니에서 삶의 의미보다는 생존에 급급한 부랑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원주민 우대 정책으로 평생을 박대 속에 살아온 화교들은 그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면 그야말로 열심히 살고 있다. 정말 신기한 점은 화교 공동체가 절차보다는 효율성과 속도를 최우선시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효율성은 한국을 능가할 정도다.


이 모든 경험 끝에 나는 두 번의 게이트 전환을 거쳐 자카르타로 향하는 비행기 MH-727편에 몸을 실었다. 부디 이번에는 생명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길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