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3일, 업무적으로 알게 된 지인을 만났다. 거의 1년 만에 만난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해서 그런지 한결 더 편해 보였고,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더욱더 우아한 자태가 내 두 눈을 사로잡았다.
그녀와 나는 거의 아무도 없는 휑한 일식당에 앉아 미역줄기 샐러드 한 접시와 계란말이를 시켜놓고 3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둘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다면 둘 다 영국에서 공부했다는 점뿐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둘 다 지지리 궁상맞게 엄청 아끼면서 살았고, 나름 쎄빠지게 고생했다는 공통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당시 1파운드 환율이 2천 원일 때라서 허리띠를 졸라맨 일, 무엇이든 Buy 1 Get 1 Free (1+1 떨이)만 장보기 옵션으로 본 일, 제일 싼 슈퍼마켓인 아스다와 모리슨, 가끔 테스코와 세인스버리 간 일, 미친 듯이 비싼 공과세, 말도 안 되게 후진 교통시설 - 특히, 지하철(Tube)과 기차 - 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이 거금을 들이며 런던을 여행했던 일. 남들 다 타는 블랙캡 한번 타보지 못한 일, 세상 우울하고 축축한 영국의 기나 긴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전기세 폭탄 맞을까 봐 두려워 레디에이터를 시간 제한해 놓고 쓴 일 등을 하나하나 나열해 보이니, 그때의 시간들이 지금은 웃음 나오는 에피소드였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했던 일이었는데 하며, 1파운드 아끼려고 시간을 손해 본일이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련했던 거 같다.
내가 영국을 2009년 9월에 떠났으니, 이미 10년도 넘은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영국은 그녀와 나의 애증이 서린 국가라며 우리의 기나 긴 대화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영국에서의 생활을 다시 한번 혼자서 되돌아보니 지지리 궁상맞게 지낸 것은 표면적 사실이지만, 그만큼 상상과 사고력이라는 돈따위론 감히 환산할 수 없는, 그리고 적어도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내면의 힘을 길렀다는 점이 물리적 고생을 지배할 만큼 중요했다고 결론지으며, 추억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랬다. 당시엔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지만, '돈'이라는 족쇄 때문에 하고 싶은 거 다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난해서 서럽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가난한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걷고, 길을 잃어도 좋으니 무턱대고 하루 종일 걸었던 날들도 비일비재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구글맵도 없었고, 외운 길에 발걸음을 의존할 뿐이었다. 이 모든 걸음을 힘들다고 여기기보다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라며, 끝에 닿지 못한 생각과 상상을 조금 더 하기 위해 발바닥이 아프고, 새끼발가락에 물집에 생겨도 아픔을 참고 걸었다.
내가 수학한 영국 동부 노리치(Norwich)는 원래 농업지대라서 드넓은 초록들판이 여기저기 있고, 걸을 수 있는 곳도 많다. 이곳을 걷다 보면 '목가적인 평화로움'이 바로 이런 것이라며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적함에 빠져들었다. 대학교 졸업 때쯤에는 지긋지긋한 영국의 생활을 마무리하는 것에 대해 홀가분함과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오는 아쉬움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이 교차하여 집에서 또는 학교에서 40분씩 걸어간 숲 속에서 가장 건조한 통나무 위에 앉아 멍 때리기도 하고, 때론 울기도 했다.
상상이 주는 기쁨과 자발적 고뇌는 무료함은커녕태생적으로 잘 생기지 않던 열정의 불씨를 지피우며, 하루하루 영국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조금 더 의미 있게 지내보자며 다짐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싶은 거 충분히 다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만큼 돈 벌고 있는데도 상상은커녕 하루의 되새김질이라는 의식(ritual) 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어제 뭐 했는지 완전히 까먹을 때도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러다가 아무것도 추억하지 못하는 고리타분 어른으로 치부되겠단 두려움도 엄습하지만, 이내 일거리가 밀려오고 신용카드 고지서니 공과금이니 하는 숫자들이 빽빽이 적힌 우편물들을 보면, 자본주의라는 게임을 잘하진 못하더라도 패자는 되지 말아야 지란 얄팍한 생각으로 그나마 상상하려도 아껴두었던 에너지까지 소진하고 만다.
사회의 부조리함도 '그럴 수 있지' 또는 '나 살기도 바쁜데 성가시네.'라며 외면하고, 그 문제들을 보려고 조차 하지 않는 나 자신이 어떨 때는 부끄러워 침실 밖을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다.
2024년 2월 14일, 인도네시아는 대선을 치렀는데, 1998-9년 수하르토 정권퇴진을 요구했던 민주화세력을 탄압했고,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여 인도네시아 인권운동가들의 지탄을 받아왔던 군출신이 3수 끝에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 역시 '어쩌겠어.'라며 남일처럼 대하는 나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이다. 영혼 없이 이렇게 뻔뻔한 자가 되었다니. 세상에 수많은 부조리와 세력편승이 기승을 부리지만, 이 모든 것도 능력이 없으면 하기 어렵단 비참한 소리를 할 때의 내 모습을 차마 거울로 보고 싶진 않다. 최소한의 소극적 양심선언이라고 자기위로 해야 하나. 나도 이렇게 비겁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단 깨달음은 수치심이 되어 삶의 의미를 찾길 포기한 한 인간의 군상이 이 정도로 비굴하고 못난 지 나 자신의 온전함을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판'을 깐다는 말이 생긴 건지. 마음과 의식에도 철판을 깔고, 돈 주는 공간에 와서 자본주의라는 게임 속에 별 의미 없는 기능을 하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소모된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더 알 수 없는 힘이 난다.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지탱해 준 내면의 힘, 즉 상상력과 사고력을 갈고닦아 길렀던 영국에서의 시간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해 준 그녀와의 시간에 감사하며, 아직도 남은 6시간을 버티기보다 살아있음을 느끼며 보내자고 스스로 되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