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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May 09. 2022

단어를 한 글자씩 틀리는 일

우리 엄마만 그런 줄 알았다. 어떤 사물의 이름,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한두 글자씩 틀리게 부르는 습관이 있는 것 말이다. 엄마의 입에서 탄생한 새로운 사물이 수십이요, 새로운 사람은 수백일 터다. 이미 있는 것을 다르게 부르는 것이니 편집자라 해야 할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이름을 지어내니 창작자라 해야 할지. 엄마의 입에서 조인성은 조우성이 되고 박서준은 박서진이 되며 아이패드는 애플패드가 된다. 아, 절대 틀리지 않는 이름도 있다. 비.


최근에서야 이런 모습이 우리 엄마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여느 집 엄마나 다 똑같다는 걸. 모든 엄마의 입은 창작소인지 편집소인지 애매한 포지션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새로운 단어들을 찍어낸다. 언젠가 한 번은 물은 적도 있다. 꼭 그렇게 하나씩 틀린다고. 알려줘도 다음에 또 똑같이 틀린다고. 엄마는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고 대꾸한다. 그 대답이 건조하게만 들렸던 건 엄마의 말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아직 노화로 인해 뭔가를 까먹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나는 나이에 비해 신체적 노화가, 그러니까 체력이 꺾이는 시기나 뭔가를 깜빡깜빡하기 시작하는 시기 등이 이른 편이다. 다시 말해 아직 이십대(끝자락)이긴 하지만 나도 슬슬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아,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보면 웃기긴 하겠다. 어린 놈이 이런 말이나 한다고. 아마 나중에 내가 나이들어서 돌이켜봤을 때도 되게 웃길 테다. 나이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노화를 경험한다고 글을 쓰나. 하지만 어쨌든 지금 체감하기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언젠가부터  단어를 한두 글자씩 틀리게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단어 이름이 한번에 생각나지 않는 일도 부지기수다. 생각이 나도 쓰려는 의도와 뜻이 약간 빗나간 유의어가 떠오른다거나 하는 것이다. 아예 이런 내 모습에 스스로가 적응을 해버린 것 같아 약간 서글프기도 하다. 벌써부터 이러는 것도 씁쓸한데 적응까지 마쳐버렸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영원함을 지니지 못했다. 끝이 있는 유한한 존재, 그래서 세상에 잠시 머물러 간다고 나그네라고도 표현하는 것일 테다. 엄마의 단어와 나의 단어가 점점 맞아들어가면서 느끼는 건 유한함만이 갖는 아름다움이다. 이로써 나와 엄마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단어는 편집되어 나오고 누군가에게 이것은 창작일 수도 있다(생전 처음 듣는 것일 테니). 의미 전달 역시 또렷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교감이랄까. 엄마와 연결되는 것 같은, 설명하기 모호하면서도 체감상 아주 또렷한 그런 기분 말이다. 결국 아, 나도 나이 들어 가는구나, 내 젊음도 영원하지 않구나, 엄마의 젊음이 영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엄마의 시간을.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무언가를 잊거나 다른 형태로 기억하거나 아예 전혀 다른 둘을 섞어서 기억하거나 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나타나는 지극히 심상한 것들이다. 이런 보통의 것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이것들을 특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망각으로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를 테면 나이듦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엄마의 시간 같은 것들 말이다. 그것들은 (아마 높은 확률로) 사유와 사고의 새로운 문을 열고 그 지대를 더 넓힐 것이다. 노인의 지혜와 깊음이 여기에서 오는 것 아니겠나.


시간은 늘 그랬듯 앞으로 앞으로 갈 것이다. 내 단어는 점점 더 일그러질 것이다. 시간이라는 자연의 섭리 안에서 단어, 이름이 편집되는 것은 엄마와 내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틀림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깊은 지속은 세대와 세대의 연합이다. 어느 생명도 세대 간의 갈등을 겪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겪는데, 어찌 됐건 우리는 동시에 지나는 시간이 다를 뿐, 결국 같은 시간을 지난다. 영유아부터 청소년, 청년에 장년을 거쳐 중년, 노년까지, 무르익고 깊어지고 넓어지며 그러다 마침내 흐려진다. 그러니까 단어의 일그러짐은 우리가 같은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 엄마는 <골때리는 그녀>에 나온 오나미를 보며 권오미라고 했다. 나는 오나미라고 정정해줬다. 이 정정을 지금은 내가 했지만, 언젠가는, 아마도 확실하게 내가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벌써부터 내 단어는 엇나가고 있으니 어쩌면 그날은 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저 바라는 것은, 그때 내 단어를 정정해주는 그 아이가 내가 지금 느낀 것을 동일하게 느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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