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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May 10. 2022

경기에서 삽니다

시골쥐 수도권 적응기

서울, 정확히는 수도권 생활은 이제 아주 심상한 일상이 됐다.

처음 상경하던 날은 비가 쏟아졌다. 49일간 이어진 전례 없는 장마 한가운데서 나는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 인턴 기간 동안은 회사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회사는 충무로역 근방이었고, 지낼 곳은 그곳에서 도보로 5분 거리였다.


그날 서울로 진입해 한강을 건너던 순간이 아직도 묘하게 다가온다. 학생 시절  달에 한두 번은 서울에 왕래했는데, 그땐 서울에 대한 로망 같은  있어서 기차가 한강을 건너는 순간이 무척이나 설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땐 서울에 '놀러' 가는 거였으니까.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 주디가 기차를 타고 처음 주토피아로 입성하던 장면이랄까. 학생  서울에 가는 모든 순간이  장면과 겹쳤다. 높은 건물에 시선을 빼앗기고 널찍한 도로와 빽빽한 자동차들에 감탄이 나왔다. 이것들과 함께 드넓게 뻗어 있는 한강과 하늘 높은  모르고 솟아 있는 남산타워,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회색 도시의 바쁜 직장인들의 멋짐( 당시 시선 기준이다) 시골쥐의 마음에 환상을 심어주기 딱이었다.


처음 상경했을 때 가장 신기하게 다가왔던 게 날이 저물어도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여기서 집은 본가, 전라도이다. 항상 서울 일정이 마무리되는 저녁이면 용산역에서 기차에 몸을 올렸다. 하지만 이제 시간에 쫓기며 용산역으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무궁화호, 또는 itx호에 몸을 의지해 세 시간 남짓을 내리 달리지 않아도 됐다. 이곳에서의 집으로 향하면 됐다. 도심의 불빛이 환히 빛나는 그 사이 어딘가 자리 잡은 작은 방. 처음 일주일간 모든 순간이 설렜다. 드디어 내 인생에 미생이 시작된 거라고 신나 했다.


그런데 지내다 보니 줄곧 지방에만 살던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이건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서울 특유의 분위기, 그러니까 주거공간과 업무공간의 확실하지 않은 경계(아파트나 빌라, 회사가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있는 그런 것들), 높이 솟은 건물 숲으로 인한 답답한 시야, 출퇴근 시간마다 이어지는 전투적인 행렬, 어딜 가나 빽빽한 인파 같은 것들이 도무지 적응이 안 되고 갑갑하게만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퍽퍽한 일상 그 자체였을 뿐, 학생 시절 가진 로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음의 공백이 사라지던 시기였달까.


그랬기에 나는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날을 더더욱 기다렸다. 어서 확실한 직장을 얻어 서울 근교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었다. 그리고 정규직 전환이 확정되던 날, 나는 곧장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위치는 경기도 고양 일산. 3호선 라인 타고 한 번에 출근할 수 있고, 1기 신도시로서 거주지와 일터가 명확하게 구분된 곳이었다. 아파트와 공원, 아이들이 다니는 거리는 나에게 막힌 호흡을 뚫어주는 숲 같았다. 사람 냄새나는 동네. 그게 일산에 대한 내 첫인상이다. 그렇게 굳은 표정에 전투적인 파워워킹만을 시전하던 서울 한복판 직장인들 사이에 껴 있다가 마주한 이곳은, 퍽퍽함을 넘어 퍼석해져버린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제 2년이 다 돼 간다. 5분 거리에 호수공원이 있고 바로 앞에는 정발산이 있다. 조용한 동네, 공원, 아파트촌, 아이들 웃음소리, 그 사이에 껴 있는 마트와 교회들. 여전히 일산은 내게 만족스러울 만큼 여유로운 동네다. 서울에서 벗어나 누리는 경기도 생활은 지방과 아주 유사하진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편안함을 보장해준다. 퇴근하고 역에 내려 일산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드는 '집에 왔다!' 하는 마음이나, 역에서 집으로 걷는 동안 두세 번쯤 심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이 복잡다단하고 쳇바퀴 굴러가듯 돌아가는 서울과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주거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사람은 일과 삶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구분돼 있어야 한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전주만큼의 여유는 없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문화생활이 있다(서울이랑 가까워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면서 걸을 전주 향교와 한옥마을 외곽 천변은 없지만, 정갈하게 조성된 도심 속 호수공원이 있다. 문득, 호수공원을 걷다 빠른 시일 내에 해 질 녘 즈음 유아차에 아이를 태워서 함께 호수공원을 산책할 수 있는 전투적이고 평화로운 날이 온다면 아주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삶이 만들어져가고 있는 이곳이 퍽 마음에 든다는 것이겠지.


나는 경기에 산다.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 이건 곧 있을 퇴사로 사라질 일상이겠지만, 어쨌든 현재는 그렇다. 아마 퇴사를 하면 온전한 경기에서의 생활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테다. 공부를 하고, 사역을 하며, 글을 써 나가고 이로써 소통하는, 지극히 작가적인 삶. 이곳에서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말하는 시간들이 내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어쩌면 여기서 아주심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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