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ook적북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적휘적 Apr 29. 2021

아주 보통의 홈리스

마음의 평안을 주는 집은 어디에

그러니까 이건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이다. 너무도 가까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아주 보통의 문제. 어쩌면 자신이 문제의 당사자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취업에 성공해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내가 머물렀던 곧은 고시원이었다.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보증금도 없고 곧장 방을 빼도 괜찮은 숙소를 택한 것이다. 약 3개월간 그곳에 살면서 든 단하나의 생각은 다시는 이런 곳에 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서울이라는 공간은 꿈과 기회의 공간으로 그려지곤 한다. 대한민국 자본의 9할이 쏠려 있는 곳.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우리는 서울로 가야 일자리가 있고 문화가 있고 롯데월드가 있다. 나 역시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며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뜨겠다는 꿈을 꿨다. 서울로망이랄까.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판타지에 푹 빠져 언젠가 하게 될 서울생활을 스케치해보곤 했다.


하지만 우리의 꿈과 현실은 언제나 상반되는 . 분주하고 전추적인 출근길에서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표정, 퇴근  직장 동기와 또는 친구와 기울이는 맥주  ,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으로 뒤덮힌 밤거리,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 또는 잠실 롯데타워, 주말이면 각종 연극과 뮤지컬, 전시회를 누비는 여유. 그러니까 이건 직장 봉급 하나만으로 월세를 포함한 각종 고정지출을 감당하고 먹고살  있으며 와중에 적금도   있는 사람들이나 누릴  있는 것이라는  그땐 알지 못했다.


잠시 머물렀음에도 그곳의 느낌과 기억은 생생하다. 늦은  복도에 들어설 때면 방문을 뚫고 들려오던 307호의  고는 소리, 현관에서부터 코를 찌르는 눅눅하고 쿰쿰한 곰팡내, 에어컨을 아무리 틀어둬도 빠지지 않는 습기에 쭈굴쭈굴해지던 ,  너머에서 들려오던 비속어(오버워치 하면서 욕을 그렇게 하더라),  벽을 뒤흔들며 돌아가던 먼지 잔뜩  세탁기까지. 내가 경험한 노숙 직전의 최소주거형태는 그런 모양이었다.


퇴근 후 향하는 곳이며, 지친 몸을 누이는 곳이지만 집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 곳. 침대에서 손을 뻗으면 책상이 닿고 머리맡에는 유리벽으로 경계를 이룬 화장실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곳. 그나마 내가 지냈던 곳은 발 디딜 공간은 있는 곳이었다. 옷장도 있고 밖으로 난 창문도 있었다. 그래서 월세가 고시원 주제에 50만 원이나 했지만, 어쨌든 내가 본 곳 중에는 그나마 살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살 만한 곳’도 나에게는 지낼 곳이 못되었다. 집이란 몇 걸음이라도 걸어 다닐 수 있는 크기여야 한다는 소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월 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이며 살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머물렀던 곳은 정말, 아주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음이 드러났다. 내 기준이 높았을 뿐, 그보다 훨씬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인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한 평 남짓 되는 방에서 살림을 이어가는 이들의 이야기, 겨우 한 평인데도 월세는 20만 원을 훌쩍 넘고 30만 원이 넘는 곳도 있다는 사실, 그런 곳에서 나아지지 않는 미래로 한걸음씩 내딛는 사람들이 여전히 찬란한 기회의 땅 서울에 잔존한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들에게 겨우 한 평 가량의 방을 제공하면서 분에 넘치는 월세를 챙기는 착취구조이다. 쪽방 주인은 보통은 거부인 경우가 많은데, 자신들은 투기 형식으로 쪽방을 사들여 중간관리자를 세우고 벼랑 끝에 내몰려 더 나아지기 어려운 이들의 삶을 터무니없는 월세로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내가 살던 고시원도 주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던 사람이 중간관리자였던 것 같다. 본인은 월세를 깎아주고 싶어도 주인이 안 된다는 말을 흘린 적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 사실들이 보도된 게 2019년의 일. 이러한 행태는 지금 좀 나아졌을까. 아마 아니겠지. 사회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으니.


쪽방촌에 이어 서울 대학가에 떠오르는 신쪽방은 소외계층이 아닌 청년 착취의 근간이다. 이는 기존의 집을 여러 개로 쪼개서 방을 세 놓는 것이다. 이러한 방은 국가에서 최소주거형태로 지정한 5평이 되지 않는다. 청춘이라는 이유로, 열정이라는 말로 우리는 착취당해 마땅한가. 과거 세대가 그랬으니 우리 역시 비슷한 고생을 해봐야 하는가. 시대가 변했다. 개천에서 용 나던 7080에는 밑천 없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어지간한 돈은 밑천도 되지 못하며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신쪽방에 겨우 몸을 구겨넣으며 그곳을 ‘집’이라고 칭하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근 과거를 회상하며 소확행을 찾는 2030의 행태만을 지적할 게 아니다.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현실, 그 밑바닥에 있는 착취구조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나. 어쩌면 상경한 청년들도 소외계층이 되고 있는 걸까.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볼 때마다 숨이 퍽, 하고 막히는 기분이다. 진짜 평등이라는 게 있을까. 민주주의, 자본주의, 이 사회에 공존하는 이 두 가지의 개념은 사실 애초에 상충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평등만을 외칠 뿐, 진짜 사회 모든 면의 평등을 누가 바랄까.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고통을 외면하는 건, 어쩌면 인류의 본능적인 관습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건 자본의 흐름도, 보장되지 않는 미래도 착취와 불평등의 타당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줄곧 사람이 처한 상황은 인과응보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누굴 탓할 것도, 탓해서도 안 된다고. 이게 각자만이 갖는 필사적이었던 역사를 싸그리 뭉개버리는 발상이라고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타인의 아픔을 나누고 그렇게 함으로써 좀 더 좋은 세상이 오길 바랐으면서 그것을 외면하는 데는 도가 튼 내 모습이 역겹다.


 글을 쓰는 이유는 딱 하나, 좀 더 살 만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나는 시선을 지금보다 더 아래로, 바로 옆으로 돌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며 귀를 열어야지. 그래야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쓸 수 있겠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조화를 마음먹어야 실현할 수 있는 지금은, 퍽퍽하기 그지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닥다리 사명감이 가지는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