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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허투루 Jul 17. 2023

작가보다 화자란 말이 더 좋다

그냥이라는 욕망




나는 작가보다 화자란 말이 더 좋다.


글 속에 “나”는 작가인 “나”보다 “화자” 즉, 글 속에 한 인물로 비치는 바람이 조금 더 크다고 할까! 한껏 비약과 과장이 차오른 서사를 짓고, 어딘가 삐뚤어지고 뒤틀린 개연성에 관한 죄의식 따위를 필사적으로 외면하고픈 욕망. 

작가라면 응당 깊이와 치열함과 갖추어야 하고, 치밀할수록 비례하는 묘사. 작가는 화자를 만들고, 잘 만들수록 작가와 화자는 독립될 테지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습작생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그래서 화자는 작가보다 먼저 존재할 수 없지만, 그래도 꿈은 꿔 볼 순 있는 게 아닌가!

독자들이 글을 보면 글의 작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진행되고 인물을 상상하고, 진술과 묘사를 따라 화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을 스케치를 하는 것. 물론 화자가 어떤 관점과 표현으로 스케치하는지 따라서 독자는 몰입할 수도 있고, ‘뭔 개소리!’ 차갑게 외면할 수 있을 터.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화자의 중요성이 읽는 이로 하여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아숩게도 나는 작가와 독자의 경계에 독자 쪽으로 더 기울어 걸쳐있기 때문에 '읽는 피로'에 더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물론 읽는 것보다 '쓰는' 스트레스가 훨씬 강력하다. 그러다 보니 관찰하고, 생각을 거듭하고, 찾고, 구성하고, 정리하고, 적합한 걸 고르고, 거르고, 고치는 작가의 일보다는 생각을 내뱉고, 돌리고, 피하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두서는 나중에 찾고, 목적지향적이고, 간결하지만 에두르고, 관념적이지만 특정적이라 무슨 말인지 뭐…… 대충 이해가 되는 화자의 일이 더 편리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화자가 더 좋은 이유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기능!! 부족함과 결핍을 부단히 애써 가려지는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은데,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있는 탓이다. 또한 그 느낌을 믿고 싶은 까닭이다. 비겁한 이유지만, 어쩌면, 비겁한 이유를 찾는 이유는 어떤 수준에 미치지 못한 열패감을 그럴듯한 변명으로 포장하고자 함이다. 그럴듯한 포장지에는 뭐가 담기든, 일단 선물 같아서 그 안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는, 대부분 꽝! 일지라도. 적어도 '꽝'을 넣어두고 싶진 않다. 꽝대신 콕. 그래 왠지 거슬리는 콕콕. 

어쨌든 나의 글쓰기는 예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심술을 부리고자 하는 것이다. 글쓰기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계획에 없는 초고일지언정 늘 완성하는 것. 그게 내 심술이다.  


 예술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심술을 부리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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