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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Sep 18. 2021

사랑이라는 연극과 숨김의 미학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로맨틱 코미디의 문을 열다

돌려 말하는 것처럼, 간접적인 표현은 그 속내가 드러나게 되면 직접적인 표현보다 더 큰 의미의 파장을 일으킨다. 동시에 그 파장이 커지려면, ‘숨김’의 기술이 굉장히 중요하다. 청자가 표현 안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선 여러 겹의 껍질을 벗겨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기술은 굉장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명도 높은 밝은 분위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 속엔 혼란스러운 현실의 사회상을 담아낸 피터와 엘렌의 사랑 연극이 있다. 오프닝부터 커튼콜까지 그 진행은 너무나 세련됐기 때문에 우리를 그날 밤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엘리와 피터의 사랑은 아주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우연한 첫 만남부터 엘리는 가방을 올리려다가 피터 위로 넘어지고, 그에게 기대어 잠을 청하기도 한다. 피터는 그런 그녀가 자꾸만 눈에 밟혀 수많은 위기에서 구해주고, 짜증을 내다가도 배고픈 그녀에게 생당근을 구해다 주기도 한다. 풋풋하고 사소한 로맨스적인 사건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감정의 전이와 발전을 아름답게 풀어낸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깊어지고, 이불로 만든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상상하는 미장센을 통해 깊은 진전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떨 땐 티격태격 대립하지만, 그 순간만큼 서로를 생각해주는 둘. 떠오르는 햇살 속 흑백의 명도 조절을 통해 아름다운 빛의 반짝임을 보여준 것만큼이나 아름답다.

하지만 작품에서 잠시 멀어져 보면, 그 둘의 사랑 자체가 숨김의 기술이라는 게 느껴진다. 1930년대의 미국은 혼란스러운 대공황의 시기였다. 근면성실을 통한 자본의 축적이 불가능해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소시민들의 절박한 희망이 짓밟히고, 사람들은 사회 구조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된다. 나아가 자신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을 향한 증오는 낙인처럼 깊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 속에서 일반적인 로맨스가 할 수 있는 건 낭만적인 사랑만을 얘기하는 수밖에 없다. 현실이 너무나 잔혹하기에 장르가 가진 힘에 기대어 시시콜콜한 사랑으로 판타지를 이루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와 피터의 사랑이 가진 기술을 하나하나 벗겨보면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터는 서사 초반에 상류층인 엘리를 철딱서니 없는 부잣집 딸이라고 생각한다. 1930년대의 미국 노동자들처럼 상류층을 향해 증오의 선입견을 품게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엘리는 상류층임에도 털털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방을 뺏겨도 모르고, 형편없는 아침 식사에도 즐거워한다. 완강한 자기주장을 가진 피터에게 과감하게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곤 한다. 그러면서 사랑이 진행된다. 이 간접적인 미장센들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로맨스가 현실의 자욱함을 잊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상류층 간의 갈등을 화해시키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없애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걸 보여준다. 히치하이킹을 수도 없이 실패한 피터 앞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공한 엘리의 모습은 상류층이 어려운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다가가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적인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속 양치기 소년이 자아실현의 근원, 피라미드 앞에서 궁극적인 소원으로 사랑을 선택한 장면처럼 진정한 사랑을 택한 주체 역시 엘리이다. 능동적인 그녀를 통해 계급의 차이가 있음에도 진정한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라는 로맨틱한 주제 의식을 실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시대의 영화라는 게 의심이 갈 정도로 정교한 내러티브와 화면 구성, 그리고 아름답고 설득력 강한 둘의 로맨스만 해도 이 영화가 찬사를 받는 근거로 손색이 없다. 다만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역시 그 속에 녹여낸 시대상과 숨김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 있고, 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는 해법을 사랑으로 보여준 감성. 비가 지독히도 내렸던 이동캠프에서 전등을 달처럼 사용한, 흑백영화기에 가능했던 미장센처럼 기발하고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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