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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Nov 14. 2021

내 삶은 때론 실습용 재료였던 때가 있었다

이원,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


실습용 재료 같은 사내와 여자가

나란히 검은 주유기를 제 옆구리에 꽂고 서 있다

그들은 서울의 밤이 꿈 대신에 선택한 텍스트이다

허공의 미터기에서 그들의 몸까지는

부패한 내장 같은 검은 호스가 늘어졌고

주유기의 금속성 손잡이는 옆구리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두 발을 각각 흰 정지선 앞에 멈추었다

오아시스 같은 붉은 간판은 허공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조금 더 길을 가야 한다

지도를 내장한 몸은 어둡고 뻑뻑하다

미터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사내와 여자의 주유량은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는다

판독되지 않는 그들의 그림자가 도로로 흘러넘쳤다

밤의 표면은 접시처럼 미끄럽고 불안하다

서울은 텍스트인 사내와 여자를

퓨즈처럼 갈아끼우기 시작한다

밤의 흐린 불속에

공기가 철근처럼 삐죽삐죽 뽑혀져 있다.

이원,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중

내 삶은 때론 실습용 재료였던 때가 있었다.

버려지면 그만이고, 안 쓰이면 그만이고.

나를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은 차고 넘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치 도로 위의 넝마, 이 사내와 여자처럼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들의 옆구리에 꽂았던 검은 주유기가 없었더라면 이들도 탈탈탈 하는 소리와 함께 서울의 밤과 함께 저물어 갔겠지. 그리고 나 또한 주렁주렁 매달은 주위 사람들이 주유기처럼 꽂혀있지 않았다면 함께 저물어 갔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냥 조금 더 길을 가는 이들이, 조금 더 길을 가니까 또 갈 수밖에 없던 이들이 아파하며 걸어오는 나와 얼핏 같은 서사를 지녔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실습용 재료였던 때가 있었다면, 정말 찬란히 저물어가는 노을 속에서 굉음을 내뿜으며 서울의 도로를 가로지르던 때가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롤러코스터가 위로 올라가면 다시 내려간다.

다시 내려갔다면, 또다시 올라갈 일이 있을 거라고.

거추장스러운 아름다움 없이 그냥 앞으로 향하는 시니컬이 조금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나도 서울의 밤 속 빛이 나는 별이 되는 순간이 오겠지. 잡스러운 튜닝 없이 엔진과 바퀴만 있으면 그냥 나도 굴러가야겠다. 저무는 순간들은 도로 위의 돌처럼 생각해야겠다. 덜커덩하는 소리 정도야 채찍으로 생각하면 되지. 뿌연 매연이 사뭇 진지했던 고민들을 대변할 것이다. 그리고 곧 삐죽 뽑힌 공기 속으로 흩어질 것이므로.

그래, 아직 멈추지 않았으니 달려는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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