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주피터 선생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이렇게 늦은 밤에 선생님을 찾습니다. 선생님을 찾고 있자니 선생님께서 제게 와주셨던 날들을 처음부터 세어보게 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두려워한 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대신 와주셨습니다. 너무도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그 자리들에 고요하게 찾아오셨습니다. 저를 처음 만난 날,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저를 발견하셨는지요. 주피터 선생님께서 이곳을 떠난 지 오래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처음은 저희 반 학생의 학부모 상담일이었습니다. 학교라는 직장에 적응도 제대로 못 한 채 처음 맡게 된 학급의 첫 학부모 상담이었습니다. 다들 별일 없이 무사히 마친다지만 그게 그렇게나 무서웠습니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그날의 떨림이 또렷하게 느껴져 옵니다. 어쩌면 주피터 선생님과 처음 만났던 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함을 여쭙는 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주 피터입니다.” ‘주’가 성씨임을 강조하려는 듯 말이에요. 선생님께서는 제가 일주일을 꼬박 준비해 더듬거리는 말투로 늘어놓았던 인사치레들에 빙그레 웃으면서 답하셨어요. “괜찮습니다.”라고요. 선생님의 그 어딘지 모르게 건조하면서도 부드러운 말씀에 기분이 풀어졌던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이 적어준 학부모 명단에 선생님의 성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도 어쩐지 오히려 안심되었습니다.
선생님과의 상담은 상담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입을 떼시자마자 저는 엉엉 울어버리고야 말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에게 좋지 않은 첫인상을 심어드린 것이 아닐지 우려되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그날 저는 선생님의 품에 안겨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긴 머리칼이 제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쳤습니다. 금빛과 은빛이 뒤섞인 듯한 선생님의 머리칼은 꽤 차가웠지만 이내 따뜻해졌지요. 그 신비로운 빛깔과 촉감이 궁금해 선생님을 다시 뵙고 싶어졌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짓고 계셨을 표정도 궁금했고요.
뜻밖에도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 것은 이틀 뒤, 대학 동기의 집들이에서였습니다. 자주 만나기 어려워진 네 명의 친구들이 겨우 모이기로 한 날, 선생님께서 그곳에 계셨습니다. 친구들은 선생님을 자연스럽게 저에게 소개했습니다. “너는 피터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지?” 그건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서로 초면일 것이 분명한 데도 선생님을 반가워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래 선생님의 자리에 있어야 할 가은이가 없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도 구태여 묻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죠.
왠지 그날따라 저의 이야기를 많이 털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을까요? 여자는 선생님이 최고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사범대에 가게 되었을 때, 첫사랑이 완전히 실패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로 해외 유학을 포기했을 때, 졸업 이후 여행 한 번을 가보지 못하고 4번의 임용 시험을 치러야 했을 때, 유학을 떠났던 가은이가 돌아왔을 때, 그 많은 ‘때’에 사실은 정말 괜찮지 않았다는 말을 털어놓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학교 업무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며 울자 자기도 그랬다며 함께 울어주었던 친구들의 얼굴도요. 그때 선생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눈을 감고 옅은 미소를 띠고 계셨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선생님의 품에 다시 안겨 울고만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못내 아쉬워 친구들을 다시 불러모았지만, 선생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선생님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죠. 그런데 여전히 가은이도 없었습니다. 남몰래 좋아하던 마음을 알아차리고도 아는 체 한 번을 하지 않았던 나의 친구, 그렇게 훌쩍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뒤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강사가 되어 돌아온 나의 친구. 가은이는 그렇게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번엔 제가 아는 체를 하지 않을 차례인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을 다시 만났던 건 일주일 뒤였습니다. 임용 시험에 합격한 날로 이제야 혼삿길이 풀렸다며 야단을 떨던 어머니의 성화에 나이 차이가 7살이 나고, 변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사람을 소개받았었지요. 그를 만나기로 했던 카페에, 뜻밖에도 선생님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시던 선생님을 부르자,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저와 눈을 맞추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선생님의 눈동자에 어두운 빛의 푸른 색채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새삼스럽게도요. 그건 푸른색 중에서도 깊고 고요한 호수의 푸른색 같았습니다.
선생님, 혹시 아시나요. 사실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제 세상은 기울어 있었습니다. 저와 제 세상이 모두 20도 정도 기울어져 점점 짓눌려 가는 듯한 감각 때문에, 저는 몸이 완전히 접혀버릴 것만 같아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제 기울어지지 않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선생님 덕분이겠죠. 선생님의 눈에 자리한 그 푸른 빛의 고요함. 그 고요함이 저를 강하게도 잡아 주었기 때문일 테지요.
7살 차이가 나는 변리사 대신 선생님과 함께했던 밤, 제 몸에 선연하게 새겨진 그 감정을 선생님께서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 곁에서 지새운 밤은 가볍고도 무거웠습니다. 꼭 그렇게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몸은 구름 위에 떠다닐 것 같이 가벼웠지만, 끝도 없는 무게가 느껴지는 공기에 둘러싸여 있는 듯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온몸과 마음이 고이 접힐 것만 같았습니다. 눈을 감고 그냥 접혀 버리고픈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선생님께도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께 늘어놓는 말에도 선생님께서는 대답 한 번을 않고, 제 몸 곳곳에 입을 맞춰 주셨습니다. 아마 그것은 긴 답변을 대신한 선생님의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대답은 아직도 제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그냥 미소만 짓고 계셨을 뿐이지만요. 미소와 입맞춤이 있었지만, 또 없었기에. 저는 그 밤이 가볍고도 무거웠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의 눈동자를 떠올리면 아직 제가 우주 한복판에 잠겨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그 밤 이후로 제 곁에서 사라진 것들을 되새기며 제가 잠겨 있는 이 고요한 곳이 현실임을 알아차립니다. 가은이, 부모님, 주피터 선생님.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떠올리면 어느새 하나의 이름만 남습니다.
주피터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금빛과 은빛이 뒤섞인 선생님의 그 거대하고 고요한 자태를 향해 저는 매일 밤 기도했습니다. 아득히 까만 밤하늘에서조차도 운이 좋아야 작은 반짝임으로만 뵐 수 있었지만,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모조리 사라지게 해달라고요.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이 언제나 두려웠던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터벅거리며 겨우 도착했지만 꿈꾸지 않았던 직장도, 보란 듯이 반짝이던 가은이도, 그 반짝임을 가득 안고 싶었던 마음도, 원치 않았던 만남도, 그리고 이것들에 마음대로 저를 붙여놓으려 어릴 적 장롱에 저를 가두어두기도 했던 부모님도, 그러다 태어나버린 두려워하는 마음 탓에 기울어진 세상도. 주피터 선생님이라면 모조리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말로 이들이 사라져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선생님과 닮은 고요함만이 가득한 곳을 원했습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는 사실 선생님의 고요함이 고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금빛과 은빛이 뒤섞인 선생님의 머리칼이 수많은 태풍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선생님의 눈에 자리한 그 푸른 빛의 고요함도 호수라기보다는 태풍의 빛깔이었음을요. 어쩌면 그 빛깔조차도 제가 볼 수 있고, 보기를 원했던 색깔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저는 그런 선생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평생을 헤엄쳐도 닿지 못하고, 평생을 바라보아도 다 알지 못할 선생님을요. 선생님께서 결국 저를 떠나신 것은 아마 제가 이 사실들조차도 모조리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소원을 온전히 이뤄주시기 위해 나누어주신 다정함의 끝이 당신의 소멸이었을 테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저에게 내어주신 다정함 덕분에 완성된, 이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세상은 정말 달콤하고 고요합니다. 그러나 전 이 고요함 속에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름 하나 없이 펼쳐진 세상에서도 접히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남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지는 동안 그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조차 없었던 저를요. 제 책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의 책임으로만 남겨두기도 싫습니다. 그래서 이 고요함 속에서도 다시 주피터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선생님, 아직 그것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라보기는커녕 두려움에 완전히 접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누구도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들이 조금은 보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내가 꿈꾼 길을 반짝이며 달려간 소중한 친구 가은이도, 가은이에게 품었던 마음의 조각들도, 꿈꾸지는 않았대도 채워낼 수 있는 의미로 가득한 직장도, 원치 않았던 만큼 원하는 결말로 끝낼 수 있던 만남도, 부모님도요.
마지막으로 주피터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정말 보고 싶습니다. 밤하늘에서조차 완전히 사라져버린 선생님. 두려웠던 것으로 찾아와 그것들을 모두 안고서 떠나신 선생님. 그래서 주 피터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돌아와 주세요. 저를 당신의 눈동자 속에 빠뜨려 주세요. 친애하는 두려움들을 숨겨 놓은, 그 고요하게만 보이는 빛깔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것은 선생님께 비는 마지막 소원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두려움을 사랑할 자신은 여전히 없습니다. 아마 여전히 당신을 찾고 있겠지요. 그래도 그냥 안고 있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미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