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수업
오늘은 나의 축일. 부지런한 전례단 알리미 덕분에 새벽부터 축하 메시지가 줄을 잇는다.
“저의 축일이 이리 좋은 계절임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축일이 오늘이어서 좋습니다. 더욱이 여러분 곁이어서 행복합니다. 축복해주신 우리 단원 여러분도 언제까지나 행복의 날이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단체방에 감사인사를 남기고 출석수업에 간다. 뚝섬 서울방송대학.
오랜만의 출석수업임에도 익숙하고 반갑다. 여섯 번째 공부를 시작한 감회는 특별한 게 없다.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출석체크하는 과정에 자기소개 발표자로 당첨이 됐다. “방송대는 여섯 번째 입학입니다. 생각해보니 그 기간은 제가 가정과 직장에 별 일 없이 편안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대면수업의 강의가 백미다. 본부의 교수님들이 모두 일선 출석수업에 출강한다고 하니 좋았다. 특히 오늘 수업과목은 많은 생각을 요하는 시간인 듯 하다. 내가 ‘생각하는가. 생각 당하는가.’
기존의 내 생각에 ‘아니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품어야만 우리 학과 학생다운 것이란다.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수업이다.
‘콜럼버스와 신대륙의 발견’에서 원주민의 입장을 고려했는가. ‘헬렌 켈러의 생애’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선녀와 나무꾼’에서 누가 나쁜가? 효녀 심청은? ‘달달놈에서 달을 보라는 놈을 보아야 한다.’ ‘오바마 회견에서 우리 기자는 왜 질문을 던지지 못했는가.’
이러한 질문에서는 이렇게 생각해야 함을 의미한다. 전부터 이미 정해진 정의에 대해 생각의 변환를 가지며 '맞다 틀리다'가 아닌 '기존과 다르게', 합리적 의심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장애인이 의존체계가 많으면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스웨덴에서는 ’장애인이 되더라도 비록 삶의 방향은 바뀔지언정 삶의 질은 바뀌지 않는다.’를 모토로 개인이 갑자기 장애가 생기면 휠체어가 움직이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하고 활동지원사를 분야별로 4~5인을 지원한단다. 그럼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런 사업을 국가가 책임지는데 필요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가진 자의 사회복지를 위한 기여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생각했다. 복지선진국인 핀란드에서는 교통위반자의 범칙금을 소득에 비례해서 매기기 위해 경찰이 현장에서 세무서에 전화하는 영상을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무엇보다 그 제도가 생겨나기 위해서 원천적인 의견 합의를 끌어낸 그 나라의 국민성에 찬탄의 의견을 보낸다. 부럽다.
스웨덴은 학습동아리의 민주주의란다. 국민의 60%가 학습동아리 회원이라고 한다. ‘소수자의 권리 획득을 위해 그냥 있어도 주어지는 예는 없다.’
다음에서 살펴볼 문제는 갈수록 내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다양한 의견이 스스로 표출되기 시작한 결과이다.
-엄마의 가사노동은 누가 보상해야 하는가?. 아빠인가, 회사인가, 국가인가
‘엄마의 가사노동’에 보상이라니? 백번 양보하여 아빠 정도이겠지? 아니다. 아빠가 회사에서 유고를 당하거나 장애를 당하면 회사에서 이 가정에 사회보장보험의 차원에서 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경우 국가는 회사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재원은? 정부는 이런 사회적 부담을 위해 대의적인 공통의견을 결집해야 한다.
-기여입학제는 정당한가?
기여입학제는 학교에 기부금을 낸 학생에게 입학을 허가하는 제도인데 나는 과거에 흑백논리를 내세워 ‘부자에게?’라고 했었다. 생각해보니 그 기부금은 그 학과의 선순환 기능을 담당할 것이고 이것은 소득의 분배 작용을 담당할 것이다. ‘돈에 따른 차별이 정의인가’의 문제는 있을 수 있겠다. 놀이공원의 프리패스처럼.
사회복지는 사회적 위험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권리와 연대로써 불쌍한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오늘도 긴 강의실 한 켠에서 의욕에 넘친 수강생이 되어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