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카톨릭회관 전례단 교육
명동 카톨릭회관 3층에서 2주간의 전례 교육을 마쳤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간 동안 각 성당의 전례 단원이 참가하여 신부님의 강의를 듣는다.
교회 생활과 축복에 관련한 ’축복예식’과 ’성무일도‘ 그리고 장례 예식에 관한 말씀인데 특히 고대로부터 중세 근대로 이어지는 죽음의 이해 관점과 각 종교의 장례 예식의 변천사에 관한 강의였다. 태어나면서 죽음 가까이 한 발짝씩 다가가는 우리는 마지막 순간을 장례미사로 장식하는 특혜를 누린다. 모든 단원이 시종일관 휴대폰를 보거나 한눈을 파는 이는 없었다.
내가 맨 처음 명동성당에 와 본 기억은 선연하다. 그때는 카톨릭회관 자리가 명동 성모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에서 아버지가 개안수술을 하셨을 때였다. 그때는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가 아니어서 공무원에게 발급되는 의료보험 카드는 대단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신의 작은딸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첫 발령을 받고 딸의 건강보험증에 피부양자가 됐을 때의 기쁨은 컸다.
더구나 당신은 어린 시절 불의의 작은 사고로 평생을 시력과 눈의 외양에 핸디캡으로 사시다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술로서 그 화를 안고 사시다가 그 일을 계기로 새 세상을 보시게 된 것이다.
나는 병문안을 위해 휴가를 내고 서울에 다녀가곤했다. 병원에 올 때마다 명동성당 성모상 앞에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여일하게 '김승덕의 아베마리아'와 함께였다.
세월이 가고 나도 서울 사람이 되고 전례단이 되어 이곳에서 전례 교육을 받게됐다.
조금 일찍 나선다.
명동역 10번 출구를 나와 오른쪽 도로를 따라 제3터널 앞에서 명동성당 쪽으로 돌어선다. 조용히 내려와 성모상 앞에 앉는다.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내가 전례를 담당한 건 10여 년이 더 됐다. 처음으로 이사를 왔을 때 동생은 네게 말했다. ‘언니 성당 활동 한가지는 하시구려. 그런데 나이가 많아 전례는 힘들지 아마.’
난 그날로 수녀님을 졸랐다. 그렇게 투입은 되었는데 전례 단원 모집 시기가 아니라서 동기가 없었고 이로 인해 애로가 많았다. 어려움을 함께 해결할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분은 ‘누구도 다 전례는 어렵다’라며 용기를 주셨고 면담을 청한 신부님은 "한글만 마스터하면 누구라도 가능한 일. 하던 대로 하라"며 격려해주셨다.
그 일을 계기로 난 전례단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그만두려는 마음을 접게 된다.
여태껏 새벽 미사를 고수한다. 누구는 새벽 전례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나는 미사를 위해 걷는 미명의 새벽길이 좋고, 미사 후 아파트 사이로 먼동이 틀 때가 좋다. 그리고 빌딩 사이로 아침 해가 떠오르면 또 한 번 해냈다는 자신감과 함께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바로 출근, 월요일 새벽 누구보다 이른 아침 출근을 즐기곤 했다.
지금도 새벽을 고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