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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지원 Nov 06. 2024

러닝이 삼천포에 빠진 날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전란 #한강 #박찬욱 


 지난주엔 10킬로 밖에 달리지 못했다. (목요일 5킬로 + 토요일 5킬로)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와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은 여름', '달려다 아비' 세 권을 병렬로 읽으며 많은 시간 책상에 앉아 있었다. 독서를 하느라 러닝을 못한 거다. 러닝을 하느라 독서를 못한 것보다는 나은 건가? 아니면 반대인가? 하여간 독서도 러닝도 다 잘하면 좋겠지만, 사실 중년이 된 이후 노안이 심해져 책을 읽을 땐 나도 모르게 눈을 깊이 감았다가 뜬고 종종 희번덕 거리고 부라린다. 그러다가 머리도 아프고... 쉬고 싶어 진다. 그 상태에서 운동복을 갈아입고 헬스장에 가는 건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다. 그렇게 목요일, 이러다 이번 주 진짜 한 번도 못 뛰겠다 싶어 진짜 결단을 하고 헬스장에 내려갔다. 늘 하던 데로 달렸는데 갑자기, 

이건 아니다 싶어 진다. 그거 5킬로 못 달리면 어때? 내가 무슨 러닝용품 전문 브랜드의 스폰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 정하고 뛰는 건데 이렇게까지 하는 게 웃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나니 당장 stop버튼을 누르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바로 누르진 못하고 누를까 말까 갈등을 하다가 어느새 3킬로 중반쯤에 이르렀다. 이제 진짜 눌러야지 했는데, 조금만 더 달리면 4킬로고, 4킬로에서 5킬로는 후다닥 지나가는 느낌인데 여기서 stop버튼을 누르고 종일 찝찝한 거보다는 그냥 좀 참는 게 낫겠다 싶어 그냥 노래 한곡 끝날 때까지만 달려보자 했다. 그리고 드디어 5킬로에 도달했다. 상쾌한 마음으로 stop버튼을 눌렀다. 끝까지 참고 달린 나에게 상을 주는 게 당연하다 싶지만, 왠지 모르게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든다. 4.8킬로에서 딱 stop버튼을 눌렀으면 어땠을까? 왜 그런 용기를 못 냈을까? 성실한 달리기에 저항하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들끓는다.       



'나는 그들을 판단하고 싶지 않다. 조롱을 감수하면서 맞지 않는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을 나는 진심으로 존경한다. 내가 보기엔 하기 싫은 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든다. 내가 경멸하는 사람은 황소 심줄 같은 끈기를 지난 사람들이다. 참고 참아서 끝내는 어디선가 한자리 꿰차는 사람들. 그러니 너희들도 인생의 절반을 무의미한 일을 하며 살라고 권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중도 포기자들은 언제 어디서고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라 해야겠다. 참을성 좋은 사람들은 체면이니, 부모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을 다하는데,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건 여지없이 이런 부류다'

                                                                                   

 이 글은 이번 학기 복학한 우리 큰애가 수업시간에 읽고 있는 책 '인간의 조건'(저자 한승태)의 일부이다. 이 책의 저자는 '노동의 신성함'보다 '인간의 존엄'이 먼저라고 말한다. (나는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들었다고 해야 한다. 딸에게 많은 설명을 들었으니까) 노동의 신성함이 왜 절대가치가 되어야 했는지, 그로 인해 누군가는 배가 불렀겠지만, 누군가는 어떤 끔찍한 희생당했는지 자세히 알려주는 책. 매우 진보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그저 하루 5킬로 러닝 목표를 달성하고 기뻐하며 만족했으면 됐을 텐데 문득 이 책에 담긴 저항의 바이브가 

떠올라 이상한 마음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고작 하루 5킬로 러닝 목표를 채우는 일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분에 충성하는 건 아닐 거다. 내가 러닝을 중간에 그만두어도 날 조롱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힘든 달리기를 포기하는 것이 좀 더 인간적이라는 것도 아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데, 그냥 내가 요즘 러닝을 하며 최선을 다하고, 나라는 인간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긍정 에너지에 충만해 있는 것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자기 계발서 같은 뻔한 인간이 된 거 같은 느낌이랄까.  


한강작가의 노벨상 수상 이후 소설 '소년의 온다'를 읽고, 뒤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뭘 알고 그런 순서로 읽은 건 아닌데, 오묘하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이 '소년이 온다'의 작가(한강)인 듯하다. 그녀는 너무나 끔찍하고 방대한 자료를 본인이 다 먹고 마신 다음, 고운 글로 승화시켜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이후 트라우마 상태가 되고 만다. 무얼 먹을 수도, 제대로 살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가족마저 그녀를 떠나버린다. 그런 주인공이 이번엔 제주도에 가서 또 한 번 4.3이라는 살육의 현장 앞에 선다. 이것이 바로 '작별하지 않는다'의 큰 줄거리다.  

집필이 이루어진 긴 세월, 한강 그는 5.18과 4.3의 잔혹함을 자신의 살을 에는 고통으로 느꼈을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그 슬픔, 아픔 그리고 분노를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으로 수를 놓을 수가 있나. 



나에게 5.18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으로 기억된다. 90년대 초반이었는데, 이 책은 불온서적이었고, 보이게 들고 다니면 절대 안 되는 무시무시한 책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진 비극의 정치사를 관통하던 그 시절...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이나 반정부 운동을 한 건 아니고... 오히려 체제에 순응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며 살았지만, 마음과 생각만큼은 날이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쨌든 이제 그 책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불온서적이라는 타이틀을 벗었지만, 가끔 보면 또 아닌 거 같고. 아직도 북한군의 소행이니 하는 헛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그래, 이것들이 그걸 감추려는 이유가 있지, 인정 안 하고 싶은 이유가 있지, 하며 내 무뎌진 날을 다시 세우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꽤 오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걱정하며 내용이 편향적이고 외설적이라고 한다. 아마도 '채식주의자'는 외설이고, '소년의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편향적인 것일 거다. 무슨 서명을 하고 있다며 나도 가서 얼른 서명을 하란다. 유학까지 가서 공부한 친구가 왜 이러나? 하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견고한 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말을 섞고 싶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헤어질 결심. 하지만... 이게 맞나?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전란'이라는 영화를 봤다. 각본에 박찬욱, 그의 이름이 보인다. (제작도 박찬욱)


나에겐 숙제 같은 박찬욱의 영화. 그는 또 이 영화를 통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나는 2년 전 그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본 후, 리뷰를 한편 쓴 적이 있다. 

[https://brunch.co.kr/@zlzllzlz/138 영화'헤어질 결심'에서 발견한 정치적 메타포]

나는 이 영화의 남녀 주인공이 보수와 진보를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중년 아줌마의 아주 개인적인 리뷰라며 자신 없어 보이는 부제를 달았는데, '전란'을 보며 느꼈다. 어쩌면 진짜 맞을 수도! 

이번 '전란'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알려준다. 색깔마저 의병 쪽은 파랑이고, 왕과 신하 쪽은 빨강이다. 

아마도 파란색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세력일 것이고, 빨강은 이를 탄압한 세력일 것이다. 

영화는 이 두 세력의 오해와 반목, 끝없는 대립을 보여준다. 그 둘이 진보와 보수를 상징한다는 건 앞 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영화 1987에서 이한열 열사로 분한 강동원배우가 파란 옷을 입은 청의검신으로 나타나는 장면에서 나 혼자 빵! 웃음이 터졌다. 

"너무 직접적인 거 아니야?" 이제 돌려서 말하기도 힘들다는 건가?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빨강과 파랑의 싸움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적이 누구인가를 잊지 말자는 것.

주제가 너무나 교훈적이라 낯선 느낌 없지 않았지만, 어쨌든 박찬욱 그의 마음이 보수보다는 진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건 영화를 보는 내내 확실하게 느껴지고도 남는다! 생각해 보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도 그는 분명 서래의 편이었다. 내가 박찬욱의 이야기에 잘 공감하는 이유일 것이다. 확실히 내 가치관은 진보에 가깝다. 그런데 문제는 나 요즘 너무 성실하게 달리며 자기 계발서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거다. 불편한 마음은 접고 싶다. 보고 싶지 않다. 날 선 비판의식은 어디 국 끓여 먹은 건가? 누군가의 어떤 슬픔과 분노를 알면서 그것을 감당하는 나의 방식은 그저 액세서리 수준이고. 고작 5킬로 하루 달리기 목표 좀 달성했다고, 힘든 거 참고 성실하게 달렸다고 막 자긍심 폭발하는 내가... 마음에 안 드네. 하지만 운동하며 얻는 긍정 에너지 정말 달콤하다. 66 사이즈 바지 입는 거 좋다. 좋아하는 원피스 핏 맞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이건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책을 읽다가 달려서 그런가? 러닝이 삼천포로 빠져버렸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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