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 가족 여행 #먹방 #강릉 맛집 #혈당스파이크 주의
가뭄으로 미뤄둔 강릉 여행을 이번 주말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번엔 역대급 폭우란다. 지반 침하 위험을 경고하는 일기예보를 들으니 차라리 가지 말까? 안 좋은 결말의 복선이면 어떡하나?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런 내 모습이 너무나 중년스럽다. 이런저런 나쁜 기억들이 내 몸에 남아 이렇게 불쑥 고개를 든다. 그래도 여기서 접기엔 이미 많은 준비가 끝난 후다. 막내 학교엔 체험학습 신청을 했고, 숙소 예약도 마쳤고... 그냥 가자, 가... 기후위기라는 게 담론이 아니라 매일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다. 머리가 아프고 마음은 불편하다. 여행이라는 어마어마한 사치를 부리며 이러고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사실 난 아직 여행이란 게 그렇게 편하지 않다. 많이 다녀보지도 않았다. 어려서는 할머니와 살다 보니 그랬고, 커서는 빨리 취업이 되는 바람에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그놈의 아파트 중도금, 아이가 크면서는 각종 학원비와 줄줄이 이어지는 시험기간. 그리고 드디어 내가 막내를 조산하면서 시작된 병원비 폭탄 쾅쾅쾅... 1년에 한 번 해외여행도 우리에겐 사치였다. 젊을 때 놀아야 한다고 난리지만 난 중년이 돼서야 조금 여행의 맛을 보는 중이다. 작년에 두 딸을 데리고 떠난 도쿄 여행이 나에겐 신혼여행 이후 첫 해외여행이었다. 큰 딸이 스물다섯이니 조금 있으면 취업하고 시집가고... 이상하다. 딸이 어렸을 적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쏟은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좀 설레네? ( 혹시 제 글 [딸이라는 시어머니] https://brunch.co.kr/@zlzllzlz/284를 읽은 분이라면 웃을 텐데 ㅋ) 그리고 중학생인 막내는 조금 있으면 입시의 문이 열려 꼼짝 못 할 판이니 그나마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때가 요즘 잠깐이다. 그러니 즉흥적일지라도 기회가 만들어졌다면 일단 떠나는 게 맞는데 왠지 '여행'이라는 고품격 단어가 주는 압박감에 쓸데없는 책임감을 느끼며 골머릴 앓고 있다. 이래서 놀아본 사람이 논다는 건가 보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새 캐리어를 사기 위해 틈만 나면 휴대폰을 보며 검색을 한다. 설레는 건가 싶다. 이번 여행에는 새 캐리어가 꼭 필요하다. 무려 십수 년 전 두 개 한 세트로 구매한 오래된 캐리어는 우리 가족의 소소한 여행과 남편의 출장에 가끔 이용됐는데, 결국엔 큰 애 기숙사 이사용으로 리어카처럼 막 쓰이다 바퀴마저 빠지고 말았다. 지난 8월 정선 여행이 이 친구의 마지막 등판이었다. 드디어 여행 출발 바로 전 날 새 캐리어가 도착했고, 듬직해 보이는 새 캐리어에 짐을 싸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점심부터 강릉에서 먹는 것이 우리의 목표! 강릉 여행 맛집 추천 브이로그를 몇 편 보고 꼭 가봐야 한다는 식당 이름들을 머릿속에 넣어봤다. 그런데 맛집이 너무 많다! 강릉에서 먹을 끼니는 많아야 다섯 끼, 적으면 네 끼인데... 하룻밤 집을 비울 생각을 하니 이거 저거 살림 정리 할 것도 많아 결국 맛집 선발은 포기하고 그냥 출발하고 말았다. 그래도 큰 애가 골라둔 맛집 리스트를 보며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데로 골라 찾아갔는데, 무슨 일이야! 어느 한 식당도 실패가 없었다. 먹은 음식들이 모두 기가 막히게 맛있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임산부인가 싶게 불러온 배를 두들이며 내내 투덜거렸다.
강릉엔 맛있는 게 왜 이렇게 많아!
신기하게도 태백산맥을 지나니 날이 흐려진다. 정말 역대급 호우일까 봐 무서웠는데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고, 보슬비가 내리는 정도의 날씨였다. 출발 당일 점심은 국내 최초로 짬뽕 순두부를 만들었다는 동화가든. 이전 두 번의 강릉 여행에서도 우리 가족은 '짬뽕 순두부'를 먹었다. 식당은 달랐는데 경포대 앞에 있던 '최일순 순두부'. 그 식당도 줄을 서서 먹는 아주 유명한 맛집이다. 치즈순두부를 시키면 뚝배기 위에서 치즈가 화산처럼 흘러내린다. 맛도 비주얼도 젊은이들의 입맛을 저격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가짓수에 맛도 기가 막힌 각종 밑반찬의 향연... 정말 대단했다. 바로 이 '짬뽕 순두부'의 원조라는 동화가든은 최일순 순두부집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한마디로 담백하고 소박한 원조의 품격이 느껴진달까? 단정하면서 깊은 국물맛과 단출한 밑반찬에서 이런 게 자신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순두부짬뽕이 좀 맵게 느껴져 청국장을 주문했는데, 두부를 만드는 집에서 만든 청국장이라 그런지 그 깊이와 고소함이 상당했고, 표고버섯이 뚝배기에 가득 차 한 국자 풀라치면 싱싱한 표고버섯이 막 튀어나올 듯했다. 김치나 야채 같은 것보다 표고와 청국장에 집중한 크림처럼 부드러운 청국장찌개. 와...! 그리고 두 딸이 선택한 짬뽕 순두부의 국물맛을 보니 해산물 향이 깊다, 그렇게 맵지도 않고 구수하다. 매운 걸 싫어하는 남편이 먹었어도 무방할 듯 부드러운 느낌의 순두부찌개. 압력솥에서 바로 푼 듯 찰진 쌀알이 조와 함께 가득 찬 공깃밥과 이 두 국물의 어우러짐이 놀라울 지경이다. 밥과 국물이 입 속에서 섞이며 오물오물... 후루룩 넘어가는 모든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박수를 몇 번이나 쳤나 몰라... 호들갑을 떠는 날 보며 남편이 찬물을 끼얹는다. "배고플 시간이야" 나의 허기까지 한몫 거들었다고는 할지라도 이 정도의 음식이라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디저트는 초등옥수수크림라테. 카페 이름은 초당 정미소다. 초당 옥수수가 들어간 엄청 달콤하면서 부드럽고 그 와중에 쓰기까지 한 커피를 파는 곳이다. 정미소를 개조한 카페 내부 분위기가 독특하고 멋스럽다. 애견친화카페를 표방해서인지 고객이 직접 물을 따라 마시는 셀프바엔 강아지용 생수가 담긴 주전자까지 비치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리마다 주인을 향해 하트눈빛을 발사하는 강아지들이 여러 마리 보인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도 아니니 똥 치울 걱정도 없고 오로지 귀여움만 눈으로 즐길 수 있다. 너무 좋아! 내 앞에 앉은 막내가 자기가 고른 누룽지 크림 라테를 한 모금 들이키자 입가에 크림 자욱이 선명하게 남는다.
"우리 막내 중학생인데 벌써 커피를 마시네. 어때? 맛있어?"
"응! 엄청 달달해!"
맞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달하다. 그래도 자꾸 마시게 된다. 차갑고 부드럽고 달콤한 거대한 크림이 입 속으로 밀려든다. 어제 본 브이로그에서 본 어떤 여행객이 한 말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강릉에서 먹은 거 중에 이게 제일 맛있네!" 그런가? 난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 분명하다.
저녁엔 미가 식당이라는 곳에서 장치조림을 먹었다. '장치'라는 생선은 동해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이란다. 이름 모를 어떤 유튜브에서 본 기억이 나서 찾아갔는데, 다행히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앉을 수 있었다. 메뉴가 여러 가지라 뭘 주문해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그래도 안 먹어본 음식을 먹는 게 가장 의미가 있을 거 같아 시킨 메뉴가 장치조림이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 나왔는데 빨간 아구인지 아구 사촌인지 헷갈리는 생선이 빨간 국물에 풍덩 빠져 있다. 생선 조림에는 나도 일가견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뭔가 조림 치고는 국물이 너무 많나 싶었다. 그런데 이 걸쭉한 국물을 장치라는 생선의 부드러운 생선살 위에 뿌리고 한 숟갈 깊이 떠 하얀 쌀밥 위에 올려 한 숟가락 떠먹으니 뭐 씹을 새도 없이 입 속에 남은 게 없다. 다 녹아버렸나? 이렇게 부드러운 생선 조림은 내 평생 처음이야! 살보다는 껍질에서 분명 아구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 살은 아구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럼 생물 병어조림만큼 부드러운가? 아니야 더 더 부드러워! 또 박수를 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생선 이름은 '장치'다. 이토록 맛있는 생선이 왜 이렇게 조용히 존재하지? 왜 난 처음 먹어본 건 거지? 나 좀 억울하네! 공깃밥 한 그릇으로는 부족하다. 조림 국물에 빠진 감자와 무는 또 어떡하나? 무 한 조각에 밥 반공기 먹을 수 있는데, 장치 조림과 감자까지 밥이랑 먹으려면 나 도대체 공깃밥을 몇 그릇 먹어야 하나? 아이고. 분명 동해에서만 먹을 수 있는 생선이라고 했고, 먹을 수 있는 시기도 정해져 있다고 했다. 이번에 이렇게 맛을 본 건 운이 좋았다는 얘기다. 그러니 끝장을 보는 게 옳다 싶어. 외쳤다. 이모님, 공깃밥 하나 더 주세요!!
다음 날 아침은 호텔 조식이라 특색은 없었지만 평범한 모닝빵에 초당옥수수가 들어갔는지 맛이 달콤했다는 게 인상에 남는다. 튀긴 돈가스가 노란 불빛 아래 쌓여 있는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라 몇 개 가져다가 초당 옥수수가 들어간 달달한 모닝빵에 끼워 넣어 먹었더니 왜 이렇게 맛있는 건가? 여행이잖아, 강릉이잖아, 하면서 폭풍 흡입을 하던 중 식당 창밖으로 러닝 하는 젊은 커플이 눈에 들어와 잠깐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이미 게임이 끝난듯한 이 느낌... 여기서 멈추나 몇 개 더 먹고 멈추나 비슷할 거 같아 그냥 과일까지 야무지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든 생각, 점심은 뭘 먹지?
점심은 감자전과 옹심이 들깨 수제비로 유명한 감자적 1번지로 정했다. 강릉 중앙시장에 들러 소머리국밥을 먹을 까도 생각했지만, 주차를 하려고 몇 바퀴 돌다가 포기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많은 관광객이 많이 시장으로 몰려든 거 같았다. 감자적 1번지에 가서 뜨끈한 국물과 함께 수제비와 옹심이를 먹는 상상만 했는데도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 신기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벌써 주차장이 북적인다. 맛집이 분명하다. 실내 자리와 실외 파라솔 자리 중 선택하라기에 난 대기가 적은 실외로 선택했고 아주 잠깐 대기 후 바로 앉을 수 있었다. 다행히 비가 그치고 해나 나와 밝은 기운을 느끼며 기분 좋게 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치 접시 한 장이 휙 날아오듯 감자전 한 장이 담긴 접시가 바로 테이블 위에 놓였다. 노릇노릇 지글지글! 감자전에서 소리가 난다. 젓가락으로 찢어 먹으니 와! 진짜 깜짝 놀랄 맛이다. 쫀득은 기본이다. 그런데 쫀득거리면서도 또 부드럽게 찢어지는 성긴 텍스쳐는 무슨 일이야? 쪽파가 둥둥 뜬 맑은 간장을 찍어 한 점 입속에 넣으니 스르르 또 사라진다. 강릉음식은 사라지는 게 특징인가? 법칙인가? 들깨 수제비와 장칼국수 묵사발까지 아침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다니...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자옹심이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물어보니 아차차 주문에서 누락돼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난 좀 기다려서 먹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남편은 이 또한 기회라며 옹심이가 빠진 자리에 갑자기 수제버거를 채우겠다고 한다. 막내가 신나서 호응한다. 수제버거!!!! 강릉 수제버거가 그렇게 유명하단다. 과한 식탐이 아닌 가 싶어 난 좀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버거 하나 정도야 어떻겠나 싶어 옹심이에 대한 아쉬움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옹심이 먹으러 꼭 올게요~" 사장님이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를 하셨는데, 남편은 완전 러키비키라는 표정이다.
우린 모두 차에 타고 유명한 수제버거 맛집을 검색해 달려가는데 갑자기 유튜브 영상에서 본 맛집 간판이 눈에 띈다. [리틀 다이너] "어? 어!! 어어어!!!! 저기 엄청 맛있다고 하던데??
팬케이크를 구워서 햄버거를 만들어주는 집 이래. 칼로리는 어마어마하지만, 맛은 기가 막히다고 했는데 한 번 가볼까?" 큰 애가 우리가 원래 가기로 한 수제버거 집이 그저 그렇다는 댓글 하나를 읽어준다. 그럼 고민하지 말고 유턴! 리틀 다이너라는 식당 내부는 여기 정말 미국인가 싶을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다. 우리는 와플 사이에 치킨을 넣은 버거와 오리지널 팬케이크 버거, 크림소스 팬케이크 버거, 그리고 초코와 바닐라 셰이크를 주문했다. 방금 점심을 먹고 와서 1인 1 메뉴를 지키지 않아도 되냐는 나의 질문에 직원은 전혀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대답한다. 곧이어 둥근 테이블 가득 접시가 하나씩 놓이기 시작했다. 셰이크까지 놓이고 나니 난 좀 불안했다. 이렇게 꽉 차다니... 우리가 이 음식을 다 먹을 수 있나? 싶었는데, 이 접시에서 조금 저 접시에서 조금 서로서로 이 맛 저 맛을 보며 감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접시가 텅 비고 말았다. 우리 정말 이거 다 먹은 거야? 남김없이? 방금 전에 감자적 1번지에서 옹심이 빼고 다 먹었잖아!!
집으로 오는 길, 난 혈당 스파이크 때문인지 기억이 없다. 남편에겐 중간에 운전을 해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너무 많이 먹었다. 사람들이 먹방 유튜브 왜 보는지 모르겠다고, 너무 많이 먹는 거 옳지 않다고 말한 적도 있었는데... 긴 인생길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한동안 외식 없이 집밥에 매진하는 걸로 이 빚을 청산해야겠다. 강릉엔 맛있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