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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남편 있잖아!

요가하는 중년 여성들의 매운맛 수다

by 임지원


요가를 시작하는 시간은 오전 9시, 서둘러 준비하고 커뮤니티센터로 내려간다. 3, 4분 정도 일찍 내려가면 종종 재밌는 수다에 합류하는 행운을 누린다. 11월 중순이다 보니 시작은 김장이다. OO 씨 김장했어요? 그러다가 김장을 하러 시댁을 가네, 안 가네 하면서 며느리의 고충으로 수다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바뀌었는데, 그 끝에 문제의 남편이 서 있다.


"요즘 모임 나가면 나만 남편 있잖아! 그래요. 60대 과부 행복지수가 제일 높다잖아요."


얼마 전 들어오신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언니 신입회원의 한 마디에 다들 웃음이 빵 터졌다. 없어야 할 게 있다는 듯 말하는 "나만 남편 있잖아!" 그 부분에서 웃음소리가 폭발하듯 시작됐다. 그 바람에 뒷자리에 자리 잡은 난 그 행복지수라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무슨 지수요??"


언니 신입회원분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며 친절하게 알려주신다.


"행. 복. 지. 수"


단전부터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난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과부라는 단어를 듣고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건가? 성경책에서 만난 그 단어는 참으로 슬프고 슬프고 슬픈 단어였는데... 그리고 이어진 다른 언니의 한 마디.

"밥은 잘 먹는데 어떡해. 내다 버릴 수도 없고..."


또 한 번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이 언니의 남편은 금융인으로 오롯이 한 길을 걸어오다 지점장까지 하시고 얼마 전 은퇴를 했다. 언니는 남편에게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안아주고 등도 두드려주었다고 했었다. 이런 드라마틱한 장면 다음에도 일상은 계속된다. 이런저런 고충이 따라온다. 이제 9시. 드디어 명상이 시작된다. 나동그라질 만큼 힘차게 웃고 고요하게 앉아있으니 입꼬리가 계속 올라가는 느낌이다. 싱잉볼 소리가 뎅~~ 뎅~~ 울리자 나.. 만... 남..편..있.잖..아.... 하는 거 같다.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앙 다무니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요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딸과 차를 마시며 '나만 남편 있잖아' 이야기를 꺼내니 딸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아마도 밥 때문일 거라고, 아이들이 다 크면 적어도 밥 차릴 의무에서는 벗어나는데 갑자기 남편 밥을 챙겨줘야 하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냐고 말해준다. 물론 엄마는 늦둥이를 낳아서 아직 밥차릴 의무가 있고...(요즘은 취준생인 너도 집에 있고... 흠흠) 그러자 딸이 남자들이 요리를 배우면 어떻겠냐고 한다. 난 남자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진짜 제대로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남편들도 있을지 모른다고 말해준다. 딸은 내 말에 수긍하는 것 같지 않다. 퇴근한 남편과 함께 한 저녁 식탁에서도 '나만 남편 있잖아' 수다는 계속 됐다.


"60대 과부 행복지수가 젤 높데, 모임 나가면 나만 남편 있잖아! 한다잖아. 남자들 진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딸이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요리 배우면 어때?"

아빠가 찬밥 신세가 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 난 남편이 어떻게 대답할지 알 거 같았다.


"난 괜찮아. 식당 두 개 정해놓고 매일매일 거기서만 먹어도 괜찮거든. 아빠는 매일 돈가스 먹어도 되고, 매일 김밥 먹어도 돼."


그럴 줄 알았다. 딱 내가 예상한 답변이다. 본인은 이 대답을 통해 효율과 배려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쨌든 귀찮은 건 안 하겠다는 거다. 힘들게 요리를 배워 스스로 해먹을 생각도 없고, 누군가를 위해 해줄 생각도 없다는 얘기다. 이러니 "나만 남편 있잖아" 소리가 나오지. 재차 설득해도 아빠의 고집이 꺾이지 않자, 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린다.

"아빠 그만 설득해. 이래서 엄마가 남자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한 거야! "

그리고 나도 홧김에 남편에게 한 마디 내뱉는다.

"60대 과부 행복지수가 제일 높데 뭔 말인지 몰라?"


딸과 아내의 공격이 이어지자 남편은 억울해 보인다. 그럴 만도 하다. 열심히 일하고 들어왔는데 괜한 구박을 받는다. 슬그머니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며 말을 돌린다.


"단감 몇 개 깎을까?"


남편이 단감 두 개를 깨끗이 씻어 도마에 올려놓고 4등분으로 자른다. 돌려 깎는 거보다 이렇게 깎는 게 낫다며 반달 같은 단감을 손에 쥐고 과도도 아닌 큰 주방칼로 쓱쓱 껍질을 깎아 접시에 놓아준다. 우리 집에서 가장 험한 일을 하는 칼이다. 날이 선 칼이라 설거지를 할 때도 조심하는 칼인데... 그래서 그런 지 잘린 감의 모서리가 살아 있다. 절도 있고 균일하게 잘린 감이 접시에 올망졸망 놓여 있다. 아빠가 펼치는 고급 기술에 딸이 놀랐다.


"와... 우리 아빠 실력 좋다. 요리도 배우면 금방 하겠네!"


딸의 특급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듯 남편이 웃는다. 나도 한 마디 보탠다.


"그러게... 당장 시집가도 되겠네."


우연이가 그려준 삽화
















그리고...

KakaoTalk_20251113_091250982.jpg 겨울이라는 주제로 그린 우연이의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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